※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뮤지컬에 빠져 살던 때가 있었다. 무대에 오르는 거의 모든 뮤지컬을 관람했고 좋은 작품은 두 번 세 번 보기도 했다. 음악에 이야기가 결합될 때의 그 힘과 카타르시스는 다른 장르가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고, 나는 그 감동에 기대 한 시절을 건넜다.

그 시절 ‘꼭 봐야 한다’며 적어놓은 뮤지컬 중 지금까지 보지 못한 작품이 두 편 있는데 그중 하나가 ‘렌트’다. 이 유명한 뮤지컬은 이상하리만치 나와 때가 맞지 않아서, 오리지널 내한으로도, 우리나라 배우들이 연기하는 버전으로도 보지 못했다. ‘틱틱붐’이 뮤지컬 ‘렌트’를 만든 작가이자 연출가이며 작곡가인 ‘조나단 라슨’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 직감했다.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고.

조나단 라슨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라슨은 8년에 걸쳐 ‘슈퍼비아’라는 뮤지컬을 만들고, 그것을 워크숍 무대에 올리는 것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슈퍼비아’를 만드는 과정에서 느낀 것들을 다시 ‘틱틱붐’이라는 뮤지컬에 담았다. 그러니까 ‘틱틱붐’은 ‘슈퍼비아’를 만드는 동안 라슨이 느낀 것에 대한 이야기다.(라슨은 ‘틱틱붐’의 모든 음악을 작곡했고, 직접 무대에 올라 공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이후 만든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렌트’다.

영화 ‘틱틱붐’은 뮤지컬 공연 ‘틱틱붐’의 무대를 재현하며, 공연 에피소드 사이사이에 조나단 라슨의 지난 시간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이 영화는 라슨의 시간을 이리저리 교차시켜 묘사하는데 그 방식이 아주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틱틱붐’이 단순히 한 편의 뮤지컬영화로, 어떤 이의 전기영화로만 환원되지 않는 이유다. 그보다는 차라리 어떤 것이 무대가 되는지, 삶의 어떤 순간이 예술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에 가깝다.

조나단 라슨은 미국 뉴욕의 허름한 옥탑방에 살고 있다. 그는 늘상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린다. 하루 중 꽤 긴 시간을 식당에서 일하는 그는 ‘슈퍼비아’를 완성하기 위해 8년간 분투해왔다.(라슨에 따르면 ‘슈퍼비아’는 죽어가는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한 풍자극이다.) 서른 살 생일을 코앞에 두고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우여곡절 끝에 ‘슈퍼비아’를 워크숍 무대에 올리게 된 것이다.

작품은 업계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만 상업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브로드웨이 진출은 좌절된다. 8년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만큼 라슨은 절망하지만 어느 날 평소 가장 존경하던 연출가 ‘스티븐 손드하임’의 격려 연락을 받게 된다. 라슨은 즉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 뮤지컬을 만드는데, 그게 바로 ‘틱틱붐’이다.

‘틱틱붐’에 나오는 모든 노래는 그야말로 조나단 라슨 그 자체다. 그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하며 느끼는 고충과, 자신이 살고 있는 낡은 옥탑방에서의 애로사항을 모두 경쾌한 노래로 만들어낸다. 사랑하는 여자친구 수잔과 티격태격하던 순간부터 가슴 아픈 이별의 순간까지, 그의 손을 거치면 모두 다양한 장르의 노래가 된다. 라슨은 또 수많은 친구들이 에이즈로 죽어가던 순간에 느낀 고통을 노래로 지어 불렀고 음악으로 사회문제를 고발하기도 했다.

주변 고통 바라본 진짜 예술가

내게는 이 대목이 굉장히 인상 깊었는데, 그의 손을 거치면 아주 평범한 소재들이 순식간에 예술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먼 곳에서 소재를 찾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겪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현실과 그 문제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인다. 라슨은 자신과, 자기 주변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바라볼 줄 아는 진짜 예술가였다.

이것은 윤리와 연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구체적이기보다 추상적이 되며, 세목은 간과한 채 당위만을 강조하게 된다. 모르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만들어야 하기에 넘겨짚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라슨은 결코 그 길로 가지 않는다. 그는 가장 일상적이고 친숙한 것을 파고드는데, 심지어 설탕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한다.(“너는 정제돼 있고, 가격도 착해. 너무 놀랍지.” 그렇다. 예술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틱틱붐’의 진정성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는 다음 작품인 ‘렌트’를 제작할 동력을 얻는다. 오프 브로드웨이를 거쳐 드디어 그의 작품이 꿈에 그리던 브로드웨이에 가게 된 순간, 그는 공연 개막을 하루 앞두고 뇌출혈로 쓰러진다. 당시 라슨의 나이 서른다섯.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진지하게 생각했다. 조나단 라슨이라는 사람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면 뮤지컬의 역사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왔을지도 모르겠다고. 라슨이 보고 느끼던 세계가 계속해서 뮤지컬 작품 안에 담겼다면, 우리는 지금쯤 무대 위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잘 알려진 고전에 노래를 넣어 뮤지컬화하거나 역사적인 소재를 뮤지컬로 만드는 방식은 필시 지금보다 인기가 덜했을 것이다.

연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영화 연출은 퓰리처상과 토니상을 수상한 뮤지컬 작곡가 겸 연출가 ‘린 마누엘 미란다’가 맡았다. 영화 연출이 처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의 감각은 탁월했다. 그는 자신 역시 라슨처럼 창작을 위해 분투하던 불안정한 시기가 있었음을 상기하며, 자기 경험과 조나단 라슨에 대한 애정을 영화에 모두 담았다. 또 탁월한 음악적 센스를 녹여 무대와 현실 장면이 교차하는 와중에도 음악의 흐름을 끊지 않는 기지를 선보였다. 그의 연출력 덕에 이 영화는 가장 뮤지컬영화다운 뮤지컬영화가 되었다.

조나단 라슨을 연기한 건 배우 앤드루 가필드인데, 그는 연기만큼이나 노래 실력도 출중했다. 천진하게 파티를 즐기거나 정신없는 식당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모습, 피아노 건반을 열정적으로 두드리며 노래하는 모습, 창작의 고뇌로 몸부림치던 모습, 이별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던 모습 모두 그대로 조나단 라슨이었다.

이 리뷰를 쓰는 동안도 ‘틱틱붐’의 노래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앤드루 가필드(조나단 라슨)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너무 일찍 떠난 그가 만들지 못한 노래들이 절절하게 듣고 싶다.

개봉 2021년 11월 12일

감독 린 마누엘 미란다

주연 앤드루 가필드, 알렉산드라 십, 로빈 드 지저스, 바네사 허진스,

       브래드리 휘트포드, 주디스 라이트

등급 12세 관람가

장르 뮤지컬, 드라마

국가 미국

러닝타임 120분

박수영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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