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판이 연일 이런저런 추문으로 얼룩지고 있다. 그래서 이번 대통령선거가 역사상 가장 ‘더러운’ 선거라는 냉소도 적지 않다. 이처럼 세태가 혼탁할수록 더욱 간절히 그리운 선인이 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마침 엊그제(음력 11월 19일)가 장군의 423번째 기일이었다.

우리는 장군이 위대하다고 칭송하면서도 정작 그 이유를 진지하게 궁리하지 않는다. 그저 사악한 왜군을 통쾌하게 물리친 민족영웅이라는 점에 열광한다. 하지만 후대의 항일(抗日)이나 반일(反日)이라는 역사적 명분이 오히려 그의 인물됨을 축소시키고 있다. 사실 그의 인간적 진면목은 임진왜란 이전, 특히 초임장교 시절에 이미 빛을 발하고 있다.

그의 청년 시절, 초임장교 시절을 전해주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 바로 이분(李芬)의 ‘행록(行錄)’이다. 저자는 장군의 친조카(큰형의 아들)로 전쟁 내내 장군을 시종한 인물이다. ‘행록’은 저자가 피붙이로서 곁에서 지켜본 장군의 모습을 담담히 증언하는 장군의 일대기다. 최근에 ‘작은아버지 이순신’(2019)이라는 제목으로 한글 번역이 새로 나왔다.

거기에는 다양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庶女)를 이순신의 첩으로 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중매를 거절했다. “벼슬길에 갓 나온 사람이 권세가의 집에 발을 들여놓아서야 되겠는가.” 또한 이조판서 율곡이 유성룡을 통해 이순신에게 만나자는 뜻을 전했다. 이때도 이순신은 그 청을 거절했다. “나와 율곡이 같은 성씨라서 만나볼 수 있지만, 그가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에 만나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순신이 발포(오늘날 고흥 소재) 책임자 시절에 전라좌수사 성박이 사람을 보내 발포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했다. 성박은 그것으로 거문고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벌목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관청의 물건이오.” 예나 지금이나 군대는 상하 관계가 엄격한 곳이다. 이순신은 상관의 요구라도 부당하면 결단코 거부했다.

이순신이 훈련원에 근무할 때 병조정랑 서익이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무리하게 승진시키려고 했다. 마침 담당관이던 이순신이 반대하자 서익이 위력을 앞세워 위협했다. 그러나 이순신이 끝까지 물러서지 않아 결국 뜻을 접었다. 이 소식이 훈련원 내에 자자하게 퍼졌다. 나중에 서익이 감독관이 되어 발포에 내려와 엉터리 장계를 올려 이순신을 파직시켰다.

복직된 이순신은 다시 훈련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마침 그에게 좋은 화살통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승 유전이 그것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화살통 하나 드리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감께서 받는 걸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이며, 또한 소인이 바치는 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유전도 “그대의 말이 옳다”라고 물러섰다.

이순신은 전라도 도사(都事) 조대중과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조대중이 역모 혐의를 받아 모든 문서를 압수당했다. 이순신을 잘 아는 의금부도사가 “공의 편지가 압수물에 포함되어 있는데 뽑아버릴까 하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단지 안부를 물은 것뿐이오. 또 압수물에 들어 있는 것을 사사로이 뽑아버리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오”라고 대꾸했다.

이런 일화들에는 이순신의 고매한 인격과 높은 도덕성이 배어 있다. 아울러 초임장교 시절 주로 북방지역에 근무한 그는 매번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며 변방의 적을 격퇴했다. 그의 모범적 행실은 조야에 널리 알려져 명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권세가의 집에 드나들며 줄을 대지 않은 탓에 벼슬이 뛰어오르지 못했다. 오히려 음해를 받아 투옥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전쟁 기운이 짙어지자 조정은 허둥지둥 능력 있는 사람을 발탁하려고 했다.

유성룡의 천거로 마침내 이순신은 여러 등급을 뛰어넘어 전라좌수사로 등용되었다. 유성룡은 한 동네에서 같이 자라면서 이순신의 인품과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전쟁 중에도 조정에 지지세력이 없던 이순신에게 큰 버팀목이었다. 나중에 이순신이 전사한 바로 그날, 얄궂게도 그 역시 조정에서 파직당했다. 그는 낙향하여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의 등용은 신의 한 수였다. 바로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행록’은 그 이후로도 이순신이 운명할 때까지 행적을 담담하게 적고 있다. 특히 그는 군인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신망이 돈독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거만한 명나라 장군들도 이순신을 존경했다. 명 제독 진린이 장군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자리에서 넘어졌을 정도다.

‘행록’ 이후 가장 먼저 이순신 전기를 펴낸 것은 일본인이었다. 바로 세키 고세이(필명)의 ‘조선 이순신전’(1892)이다. 실제 저자는 당시 조선에 근무 중이던 외교관 오다기리 마스노스케로 추정된다. 그는 ‘행록’을 필두로 여러 자료를 참고해 이순신 일대기를 추적하며 “임진·정유 두 전쟁은 일본에 어떤 교훈을 남겨주었나?”를 탐구했다. 이 최초의 전기는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2019)라는 편역서 속에 우리말로 옮겨져 수록되어 있다.

저자에 따르면, 단지 군사적 천재성만 따지면 이순신과 영국의 넬슨 제독이 비슷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격 요소까지 고려하면 이순신이 세계 최고다. 즉 이순신은 인격과 능력을 겸비한 장군이다. 사실 이순신은 군사적 능력만으로 전공을 올릴 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나라로부터 병사·군량·선박·장비를 전혀 지원받지 못했다. 스스로 전부 해결해야 했다. 당시 사정에 비추어 민관의 신망을 두루 받지 못하면 그런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 육군은 한 달 만에 서울, 두 달 만에 평양을 점령했다. 하지만 평양에서 한동안 발이 묶였다가 퇴각했다. 그들은 해군이 남해와 서해를 거쳐 올라오면 함께 북상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해군이 이순신에게 저지당하자, 후방의 불안으로 선봉의 육군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정유재란 때 일본은 원균과의 해전에서 승리하고 호남을 유린했으나 이순신에게 다시금 제해권을 빼앗겼다. 이로 인해 육군은 충청도에서 멈춰 섰다가 퇴각했다.

이처럼 해군의 패전이 일본이 임진·정유 전쟁에서 실패한 원인이라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이런 주장은 일본 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해군의 교재(敎材)에도 포함되었다. 그들은 이순신을 최고의 장수, 나아가 군신(軍神)으로 추앙하며 자국의 해군강화론을 설파했다. 실제로 해군을 강화한 일본은 머지않아 러일전쟁 때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국가의 체계적 지원 없이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이순신에게는 인격·도덕성과 군사적 천재성이 동시에 요구되었다. ‘행록’은 이런 어려운 요구에 완벽하게 부응한 그의 진면목을 담담히 보여준다. 한편 일본은 적국의 장군을 연구하여 그를 신으로까지 추앙하며 교훈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렇게 얻은 교훈을 부국강병의 재료로 삼았다.

정작 우리는 항일이나 반일에 갇혀 장군을 ‘살아있는’ 교훈으로 쓰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삶은 대통령을 비롯한 공직자의 표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행록’이 아예 있는 줄도 모르고 아직도 ‘논어’나 읊조리고 있다. 한마디로 장군의 빛나는 업적은 바른 품성과 능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다. 그것이 바로 이번 대통령선거가 영 마뜩잖은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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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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