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름난 감독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작품을 만드는 경우는 꽤 흔하다. 지금-여기와 대결하는 메시지들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자연히 과거로 시선을 돌리게 되는 것인지, 꿈꾸던 시절이 애잔하게 느껴져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만큼 이루어낸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어린 시절을 불러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의 지난 이야기가 가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아마도 감독 자신에게, 그리고 앞으로 그가 만들 영화에 이런 고백이 의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잊고 있던 처음을 돌아보는 것은 익숙해져 버린 일(영화)에 있어 좋은 자극제가 되어 준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그토록 열망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모든 게 희미해질 때쯤 뒤를 돌아보는 것은 그들의 영화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관객 입장에서도 흥미로운데, 좋아하는 감독의 유년기를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즐거움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성공 이면에 존재하는 시간의 흔적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필시 누군가의 삶에 응원이자 위로가 될 것이다.

파올로 소렌티노는 자신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와 감독의 꿈을 가지게 된 시기를 집중해서 돌아봤다.(물론 모든 이야기가 100% 사실에 기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소렌티노 특유의 (지극히 사실적이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공존하는 듯한) 연출 방식은 아주 매력적으로 작용하는데, 자신이 겪어낸 ‘객관적’ 현실과 그 순간의 ‘주관적’ 감정들이 얽히면서 하나의 감각적인 태피스트리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축구를 사랑하고 마라도나를 선망하는 파비에토는 화목한 이탈리아 가정의 막내아들이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아빠에겐 혼외 자녀가 있고, 엄마는 그 아픔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이를 악문다. 파비에토에겐 친척도 여럿 있는데, 영화는 그들의 아픔을 깊숙이 들여다보거나 거기에 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모습을 다소 경쾌한 방식으로 묘사하며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시종 웃음을 짓게 만든다.

평소 동경해 마지않던 마라도나가 자신의 고향인 나폴리로 이적해 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파비에토는 몹시 들뜬다. 그는 마라도나의 경기를 꼭 봐야 한다며 부모의 별장 여행에도 따라나서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 여행에서 부모는 일산화탄소 중독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파비에토는 고통 속에서 방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서서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그는, 이후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곤 더 이상 축구를 보지 않는다. 그저 영화감독이 되어 다른 현실로 도피하고 싶다고만 생각한다.

영화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도 이때부터다. 등장인물들의 파편적인 이야기로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영화는 그때부터 파비에토를 중심으로 수렴하기 시작한다. 큰일을 겪고 달라지기 시작한 파비에토처럼 영화의 형식 역시 새로운 옷을 입는 것이다. 또래가 열광하는 것에 덩달아 열광하고 남의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던 파비에토를 묘사할 때, 영화는 함께 분주했다. 이 파편화된 장면들은 파비에토의 불안정한 청소년기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파비에토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한다. 시종 눈이 부시던 나폴리(영화의 배경)도 파비에토의 시선이 달라지자 슬픔을 머금는 듯 보인다. 파올로 소렌티노 영화 특유의 미장센은 이번 영화에서도 감탄을 자아내는데, 놀라운 것은 이 역시 파비에토의 감정에 따라 다른 공간이 되고, 다른 색채가 된다는 것이다.(추측일 뿐이지만, 소렌티노의 이런 연출이 계산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떤 순간을 떠올리면 반사적으로 되살아나는 감정과, 그 감정에 걸맞은 배경을 그대로 영화로 옮겼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소렌티노의 천재성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명백한 단점도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모두 파비에토의 성장을 돕거나 감정을 고양시키는 존재로만 그려진다는 것이다. 파트리치아 이모는 파비에토가 흠모하는 대상이자, 그와 영혼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는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에게 ‘창녀’로 오해를 받으면서도 남편의 아이를 갖기 원하는 등 납작하고 전형적인 모습으로만 그려져 있다.

파비에토의 엄마도 마찬가지인데, 남편과의 관계에 남모를 상처를 품고 있는데도 겉으로는 밝고 장난기가 많은 사람처럼 보인다. 일례로 엄마가 아빠의 내연녀로부터 연락을 받고 울분에 차, 이를 악문 채 오렌지 저글링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독특한 만큼이나 문제적이다. 가정에서의 권력 차이와 그 폭력성에 분노하지만, 결코 들고일어나 문제제기 할 수 없는 누군가를 ‘매력적으로’ 그린다면 그 자체로 문제 아닐까?

남작 부인의 캐릭터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남작 부인은 부모를 잃은 파비에토를 대뜸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여 그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다. 파비에토는 남작 부인을 통해 또 한 번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실제로 어린 소렌티노(파비에토)에게는 파트리치아 이모나 자신의 엄마, 남작 부인이 그저 불가해한 존재였을 것이고, 그렇다 보니 영화 안에서도 그들은 추상적인 형상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드는 시점의 소렌티노가 미숙했던 과거의 시각을 그대로 재현한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또 한 가지. 영화 말미에 목표가 뚜렷해지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 선명해진 파비에토가 초반부 파트리치아 이모가 만났다고 말한 어린 수도승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가 이모를 보는 시각(대상화)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만일 파비에토가 진정으로 새로운 세계를 느꼈다면, 영화를 찍겠다며 나폴리를 떠나던 기차 안에서 파트리치아 이모와 엄마, 남작 부인을 그저 추상적인 장면 속에 담은 채 끝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상기한 것처럼 ‘신의 손’은 이야기 안에 몇 가지 뚜렷한 한계를 안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영화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이유는, 과거의 시선으로 돌아가 그때의 마음을 되살리려고 노력한 소렌티노의 노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완벽한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개봉 2021년 12월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

주연 토니 세르빌로, 테레사 사포난젤로, 루이자 라니에리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드라마

국가 이탈리아

러닝타임 135분

박수영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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