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
[2448호] 201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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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소울푸드] 정진석 외국어대 명예교수의 빈대떡

열정만큼 뜨거웠던 빈대떡 가운데 놓고…

정진석  외국어대 명예교수  

빈대떡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작은할머니께서 “빈대떡 부쳐줄까?” 하시던 말은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깊이 아로새겨 사라지지 않는다. 경상도에서 자라던 여덟 살 무렵이었다. 빈대떡은 원래 경상도 음식이 아니다. 서울과 그 이북 평안도 지방에서 많이 먹었던 것으로 안다. 그 이름을 들었던 때가 생각나는 것은 유년기부터 먹던 익숙한 음식이 아니라 초등학교 입학 후에야 처음 들었던 생소함 때문이었다.
   
   거기에 이름이 ‘빈대’라는 벌레였으니 그 혐오스러움 때문에 어린 내 기억에 깊이 각인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량이셨던 할아버지가 거느린 소실(小室)이었던 작은할머니가 내게 빈대떡을 처음 알려주신 것이다. 빈대떡은 가난한 ‘빈자(貧者)’의 음식이라 하여 빈자떡으로 불렸다는 설도 있지만, 그 이름을 처음 듣던 때와는 달리 빈대와는 물론 아무런 상관도 없고 친근한 대표적인 한국 음식의 하나라는 사실은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빈대떡 신사’는 서민음식을 표현한 노래다.
   
   빈대떡 맛을 제대로 알게 된 때는 1960년대 중반이었다. 1964년 남산에 있던 KBS 방송연구실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는데, 지금의 교보문고 뒤편 ‘열차집’에서 동료들과 빈대떡을 즐겨 먹었다. ‘열차집’은 길고 좁은 공간에 중앙의 통로를 따라 벽에 붙은 간이테이블에 나무판자로 된 긴 의자를 붙여놓은 모습이 마치 열차를 타고 가면서 막걸리를 마시는 풍경 같다 해서 붙은 옥호(屋號)였다. 맷돌을 돌리는 아주머니가 입구에 앉아 돼지비계를 철판에 둘러서 낸 기름 위에 녹두반죽을 펴서 빈대떡을 부치는 모습이 지나가는 길가에서도 보였다.
   
   공간이 좁아 겨우 열댓 명 남짓밖에 수용할 수 없는 규모였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맷돌 하나로 갈아서 구워내는 빈대떡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 없어 안달이었던 주당들은 어서 빈대떡을 더 달라고 성화를 부리곤 했다. 어리굴젓과 함께 나오는 간장에 담근 양파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돼지비계로 구운 노란색 빈대떡의 애피타이저 또는 소스에 해당하는 셈이다. 무한 리필 서비스다.
   
   그 지역이 아직 개발되기 전이었으니 열차집과 오늘의 교보문고 사이에는 작은 개천이 있었다. 흐르는 물 개천이라기보다는 시커먼 오물이 고인 웅덩이처럼 지저분했다. 술을 과하게 마신 사람이 거기 빠진 일도 있다고 들었다. 이제 말끔하게 복개가 되어 과연 예전에 그런 공간이 그 금싸라기 땅에 있었는지, 나의 착각은 아닌지 아리송하다. 그 후 기자협회 편집실장 시절에는 프레스센터에서 가까운 위치였으니 더 자주 들렀을 터이지만, 그때는 실비집, 낙지집, 미성옥, 남포면옥 등으로 찾아가는 집이 다양화되었다. 그래도 처음 직장생활을 하던 무렵에 먹던 열차집 빈대떡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근처 일대가 개발되면서 열차집은 피맛골 골목 안, 그러니까 공평동 쪽 더 넓은 집으로 옮겨 현재도 영업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문밖 길에서도 볼 수 있었던 녹두를 갈아 빈대떡을 부치던 열차집의 그 풍경은 젊은 시절의 선명한 영상으로 또렷이 남아 있다.
   
   빈대떡에 대한 추억은 더 있다. 하나는 구반포에 사시던 홍종인(1903~1998) 선생 댁에서 먹던 빈대떡이다. 언론계의 큰어른이셨던 선생은 젊은 언론인들과 만나기를 좋아하셨고 담소를 즐기셨다. 댁 근처에 사는 나는 여러 차례 선배 언론인들이 모인 선생 댁에 불려가서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벌어지는 시국담과 무궁무진 다양한 화제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홍 선생을 제일 자주 찾아뵈었던 분은 오소백(1921~2008) 선생이었다. 오 선생을 모르는 독자를 위해 잠시 소개하면 한마디로 ‘영원한 사회부장’이다. 한 신문사에 오래 근무하는 경우가 없었다. 기자로 출발하던 1948년부터 일생 10개가 넘는 언론사를 옮겨다니면서 8개 일간지의 사회부장을 지냈다. 우리 언론 사상 가장 많이 사회부장을 역임하는 전설적인 기록을 세운 분이다. 사회부 기자로 출발하여 반세기를 사회부에서 끝낸 언론인이었다.
   
   어느 땐가는 권오기 동아일보 주필(후에 동아일보 사장, 통일부 부총리)도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었고, 공보처 장관을 역임하는 손주환 기자는 같은 구반포 아파트에 살고 있었기에 몇 번 같이 모였다. 홍 선생은 산악회 회장을 지냈으니 예전 산악인들이 찾아온 때도 있었다. 이런 자리에 자주 등장하는 음식이 빈대떡이었다. 선생의 아파트 바로 앞 한신상가에서 파는 빈대떡이다. 홍종인 선생은 평양 출생이셨고, 오소백 선생은 진남포에서 태어났으니 어려서부터 빈대떡과 친근하셨을 터이다.
   
   홍 선생은 워낙 모르는 분야가 없다 해서 언론인들은 ‘홍박’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홍 박사를 줄인 별명이었다. 홍박은 음식에 관해서도 일가견이 있으셔서 빈대떡에 관한 설명도 들려주셨던 것 같다. 내용은 기억에 없지만 자주 먹었던 빈대떡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보살감투’라는 돼지 똥집에 붙은 한 부위의 이름을 알려주신 분도 홍 선생이셨다. 고인이 되신 선배 언론인들과 함께 떠오르는 빈대떡에 얽힌 그리운 추억이다.
   
   빈대떡은 또 다른 추억도 있다. 대학교수 재직 시절, 명절에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우리 집사람이 부쳐주던 빈대떡이다. 가장 간편한 손님접대 음식이었고, 학부와 대학원 젊은 학생들은 집사람의 빈대떡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평소에는 쓰지 않던 식탁용 넓은 상(床)을 펼쳐놓고 잘생긴 젊은 선남선녀 학생들과 둘러앉아 빈대떡을 나눠 먹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퇴직한 지 10년이 지나고도 벌써 몇 년이 더 흘렀다. 맡은 강의가 없으니 찾아올 제자도 없다. 그래서 서울내기 집사람이 빈대떡 부쳐서 나눠 먹던 행사가 사라진 지도 꽤 오래되었다.
   
   중년에는 나도 떡보다는 빵 종류, 중국식 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좋아했는데 나이 들면서 다시 어릴 때 먹던 한식으로 식성이 바뀌고 있다. 젊은 시절의 열차집과 그 나이 때의 정열, 어울리던 동료들, 언론계 선배들의 말석에 끼여서 먹던 빈대떡이 이어주던 분위기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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