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
[2477호] 2017.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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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소울푸드] 조은희 서초구청장의 고추장

달리는 테제베서 샌드위치에 고추장을 쓱쓱

조은희  서초구청장  

photo 김충령
된장은 비논리적이고 고추장은 역설적이다. 작가 김훈의 설명에 따르면 된장은 친화력이 커서 다른 재료와 잘 사귄다. 그 사귐의 결과로 얻어진 된장국물의 깊은 맛은 논리적으로 잘 분석되지 않는다.
   
   고추장도 친화력이 크다. 이어령 선생이 ‘맛의 교향곡’이라 일컬은 비빔밥은 고추장의 지휘 아래 다양한 재료들이 화음을 이룬다. 빨간 빛깔이 연출하는 맵고도 달콤한 그 맛은 서로 모순적이면서도 조화롭다. 내가 된장보다 고추장에 더 빠져드는 것은 그 역설적인 맛 때문이다.
   
   내가 고추장을 사랑하는 방식은 남들이 보기에 ‘비논리적’이다. 라면이나 육개장에도 고추장을 풀고, 미역국에도 고추장을 풀어먹는다. 또 죽을 먹을 때도 간장 대신 고추장으로 간하고, 김치찌개에도 고추장을 넣어 끓인다. 고추도 된장보다 고추장에 찍어 먹고, 출출할 때는 찬밥에다 참치캔을 따서 얹고 고추장으로 썩썩 비벼 먹는다. 어떤 밋밋한 음식도 고추장이 가해지면 별미(別味)로 변한다는 것이 나의 오랜 실험에서 비롯된 굳건한 ‘신념’이다.
   
   나의 고추장 집착에 얽힌 추억에는 좀 별난 것도 있다. 유럽 출장 중의 일이었다. 일정이 빡빡해 오랜 시간 쫄쫄 굶어 몹시 허기가 졌다. 다른 행선지로 가기 위해 일행들과 공항검색대를 통과하자마자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을 꺼내 대합실 한쪽 구석을 찾았다. 면세점 커피숍에서 뜨거운 물을 얻어다 모두 행복해하며 컵라면을 먹는데, 갑자기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뜩이나 짠 컵라면에다 고추장을 왕창 풀어 빨개진 면을 먹는 내 모습을 본 것이다. 김치도 아니고 고추장을 범벅해서 먹는 모습에 모두 기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랜만에 맛보는 ‘고추장 컵라면’은 콧날이 찡하도록 감격적이었다.
   
   매콤달콤하면서도 짭짤하고 구수한 라면국물을 후루룩 들이켜니 온몸의 세포가 만세를 불렀다. 역시 신토불이였다. 그동안 혀에 묻혀가지고 다녔던 느끼하고 기름진 맛들이 싹 헹궈졌다. 해외출장의 피로도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그날 외국 공항에서 먹은 ‘고추장 컵라면’은 내 생애 최고의 라면 가운데 하나였다. 김치 없으면 고추장이라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게 한국인이다. 그러나 나는 김치보다 고추장이 먼저다. 해외에 나갈 때면 꼭 고추장을 여행가방에 챙긴다. 프랑스 고속철인 테제베를 타고 달리며 샌드위치에다 고추장을 조금 발라서 먹는 맛이 얼마나 기막힌지는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여행할 때 고추장을 챙기는 것은 별난 한국인만이 아니다. 언젠가 인터뷰 기사를 보니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도 여행갈 때면 항상 핫소스를 챙긴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고추장인 셈이다. 실제로 힐러리는 고추 먹기를 최고의 건강 비결로 꼽는다. 심신이 지칠 때마다 그녀는 매운 고추를 씹으며 기력을 되찾는다고 한다.
   
   내 몸이 축 처졌을 때는 습관처럼 고추장을 찾는다. 그중 잊지 못할 추억 하나가 내 생일에 남편이 끓여준 미역국에다 고추장을 풀어 먹은 일이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사회생활로 바빠 차분히 생일상을 차려놓고 마주 앉기가 무척 힘들다. 다행히 남편이 자상한 성격이라 나 대신 음식을 차리는 경우도 많다. 그날도 나는 내 생일임에도 불구하고 새벽같이 집을 나서 하루 종일 정신없이 일에 빠져 지냈다. 저녁 늦게 물 먹은 솜처럼 축 처져 돌아오니 남편도 아들도 퇴근하지 않은 집안이 유난히 적막했다. 부엌 불을 켜니, 식탁 한가운데 미역국 한 그릇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남편이 아침에 끓여놓고 나간 것이다.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과 함께 왠지 서러운 생각도 들었다. 식어버린 미역국을 한 숟가락 뜨려니 갑자기 울컥했다. 벌떡 일어나 냉장고에서 고추장을 꺼내 듬뿍듬뿍 벌겋게 풀어 넣었다. 뻘건 미역국 한술을 다시 뜨니 갑자기 딴 세상이 열렸다. 좀 전까지 회색빛이었던 집안 풍경에 화색이 돌았다. 늘어진 현악기 줄 같았던 몸이 팽팽히 당겨지며 내 안의 소프라노가 콜로라투라의 화사한 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식약동원(食藥同源)이라고 했다. 나에게 고추장은 상비약과도 같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을 추스르는 데도 고추장은 탁효를 발휘한다. 고추에 들어있는 캡사이신 성분은 지방을 분해해 다이어트에 좋고, 혈액순환을 촉진해 우울증 개선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심신이 지쳤을 때 내가 고추장을 찾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는 셈이다. 또한 내 고향이 경북 청송으로, 청양고추의 고장인 것도 나의 유별난 고추장 사랑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추장은 심신을 추슬러줄 뿐 아니라 막힌 머릿속까지도 틔워준다. 이어령 선생에 따르면 한국 음식은 ‘열린 음식’이다. 쌈이나 비빔밥처럼 여러 재료를 고추장과 함께 취향대로 싸고 섞고 비비면 새로운 맛이 탄생한다. 바야흐로 칸막이 없는 소통과 협업이 강조되는 융복합의 시대다. 고추장으로 이것저것 비비다 보면 고정관념이라는 머릿속의 막힌 담벼락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고추장은 그 자체로 메줏가루, 고춧가루, 찹쌀가루, 엿기름, 소금에다 햇빛과 달빛, 바람 등이 어우러진 융복합의 산물이다. 고추장에는 이 시대의 대세인 퓨전도 들어 있고 통섭과 크로스오버, 하이브리드도 담겨 있다. 논리를 떠나 이질적인 것들을 섞고 연결하면 기발하고 참신한 작품들이 탄생한다. 융복합 시대를 헤쳐갈 비법이 고추장에 담겨 있는 셈이다. 행정에도 상상력, 창의력으로 반전을 추구하는 것도 고추장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마침 서울 서초구의 문화예술 축제인 ‘서리풀 페스티벌’이 9일간의 장정을 마치고 막을 내렸다. 서초의 특색 있는 골목 27곳에서 벌어진 40여개의 행사를 쫓아다니며 강행군을 하다 보니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됐다. 하지만 나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 집에 돌아와 육개장에 고추장을 풀어먹고는 바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지만 나는 고추장 힘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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