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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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뇌를 다루는 신경과 의사들은 이 복잡한 장기를 어떻게 공략하느냐가 숙제였습니다. 그런데 컴퓨터를 응용한 진단장비의 등장으로 뇌를 공략할 ‘혁명적 툴’이 생기면서 정확한 진단이 가능해졌습니다. 현재의 정밀 진단장비의 발전과 줄기세포의 연구 속도, 신약개발을 감안하면 2030년쯤 뇌전증(간질)은 완전 정복이 가능할 겁니다.”

지난 8월 말로 퇴임한 연세대 의대 신경과 이병인(65) 교수는 ‘연세대 명예교수’로 타이틀을 바꿔 달았다.

이병인 교수는 뇌전증 치료의 세계적 권위자로, 국내에 경련성 질환 치료 시스템을 도입한 개척자다. 이 교수는 1992~ 1996년 아시아태평양 신경과학회(AOCN)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이를 통해 그가 주도해 창립한 대한뇌전증학회와 세계학회의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그는 재직 중 신경과와 뇌전증 분야에서 110여편의 논문을 국제학술지(SCI-Journal)에 발표했고, 45회에 걸쳐 해외 학회의 초청연사로 참석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현재 116개 회원국이 가입한 세계 유일의 뇌전증 학회인 국제뇌전증퇴치연맹(ILAE) 이사와 아시아대양주 위원장을 맡아 개도국의 뇌전증 치료공백 해소를 위한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1974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이 교수는 공군 군의관 복무를 마치고 한국의 미개척 분야인 신경과를 전공할 요량으로 1979년 도미했다. 시카고에서 내과 전공의 과정을 밟고 있던 어느날, 당시 미네소타주립대 신경과 교수로 재직하던 이명종(李命鐘) 교수(전 서울아산병원 뇌신경센터 소장)가 “지금 미네소타로 오지 않으면 신경과를 영영 못할 것”이라며 미네소타로 불러들였다.

1983년 그는 클리블랜드 클리닉에서 뇌전증 전임의 과정을 수료한 후, 인디애나대 신경과 교수로 4년간 재직했다. 클리블랜드 클리닉 시절, 이 교수를 지도한 인물은 뇌전증의 당대 최고 권위자인 한스 루더스(Hans Luders) 교수였다. 인디애나대학병원 신경과 조교수 시절인 1986년, 이병인 교수는 뇌전증 수술을 하는 프로그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학계에 발표했다. 이 교수는 “수술적 치료를 하려면 경련을 일으키는 부위를 정확하게 판단해야 했다”며 “뇌혈류검사(SPECT)를 통해 경련을 일으킬 때의 혈류 증가 원리를 이용해 병소(病巢)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다”고 했다. 현재 그가 고안한 뇌혈류검사는 뇌전증의 수술적 치료 분야에서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으로 활용되고 있고, 그는 이 공로로 2013년 캐나다 몬트리올 세계뇌전증학회에서 수여하는 뇌전증 대사상(Ambassador of Epilepsy Award)을 받았다.

이 교수는 1988년 귀국해 연세대 의대 신경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 교수는 “귀국해 보니 김명호 교수님 한 분만 한양대 의대에서 신경과 환자들을 보고 계셨고 학회도 1982년에야 설립될 정도로 우리나라는 신경과 여건이 척박했다”면서 “김범생 가톨릭대 의대 교수, 박영춘 계명대 의대 교수 등과 함께 신경과학 1세대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이 교수가 귀국 직후 국내 최초로 동맥 내 혈전용해제를 투입해 치료한 것과 뇌졸중 환자의 등록체계를 운영하면서 환자 1000례를 분석한 논문은 뇌졸중 분야의 획기적 성과로 손꼽힌다.

뇌전증은 2000년 전 히포크라테스가 질병으로 명명하고 치료법을 제시했을 만큼 오랜 질환이다. 도스토옙스키, 나폴레옹, 소크라테스, 고흐, 차이코프스키, 성경의 사도 바울 등 다수의 역사 인물이 뇌전증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교수는 “뇌전증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약 0.7%에 해당하는 30만여명의 환자가 있으며, 매년 3만명의 환자가 새롭게 발생한다”면서 “뇌전증은 당뇨나 고혈압과 같은 일반 질병으로, 편견을 갖고 바라봐선 안 된다”고 했다.

2007년 대한신경과학회 이사장이던 이병인 교수는 대한신경과학회-한국뇌전증협회와 공동으로 심포지엄을 열어 “수천 년간 들어온 간질이란 부정적 이름부터 고쳐야 한다”며 명칭 공모에 나섰고, 결국 뇌졸중(腦卒中)과 상응하는 뇌전증(腦電症)이란 명칭으로 결정했다. 이 교수는 “뇌파검사(EEG)를 하면 이상 전기파가 픽업이 되기 때문에 병명도 실제적으로 뇌(cerebral), 전(electrical), 증(desease)이라고 한 것”이라며 “보건복지부와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법률용어가 됐다”고 설명했다.

뇌전증의 치료는 크게 약물치료와 수술치료로 나뉜다. 이병인 교수는 “약물치료는 1989년부터 16개의 신약이 나와 안정성이 크게 높아졌고, 환자의 70%가량이 약물치료로 정상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의 생활수준이 향상하면서 65세 노인들의 뇌전증 발병 확률이 크게 늘고 있다”면서 “따라서 뇌전증의 발작 억제에 포커스를 두는 것보다 노인 환자의 개인적 특성, 즉 환자의 우울증, 행동이상, 인지장애, 치매, 뇌졸중 등 동반질환 치료에 맞춰 약물을 쓰는 추세”라고 했다.

이 교수는 “항경련제를 복용해도 발작이 제어되지 않는 난치성 뇌전증 환자도 수술치료로 70% 이상이 정상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며 “최근 들어 소아수술도 활발하게 이뤄져 세브란스에서만 연간 100례 정도 시행하고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동북아 지역에서 일본과 중국의 추격으로 한국 신경과학의 위상이 최근 흔들리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2007년 대한신경과학회 이사장을 지내면서 일본신경과학회와 공동 심포지엄을 개최하면서 일본 신경과학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었죠. 우리나라는 신약을 서구에서 일찌감치 받아들여 사용했고, 일본은 자신들이 개발한 약물만 고집하다 보니 임상파트는 우리가 훨씬 좋은 성과를 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임상파트도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왔고, 오히려 중국의 추격을 받는 상황입니다. 중국은 의료가 자본주의와 결합해 신기술 개발에 첨단 검사장비 등을 과감하게 투입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한 대도 없는 자기뇌파검사 장비를 15대나 보유하고 있어요. 우리의 의료보험은 사회주의적 요소가 많아 건보공단이 의보수가를 낮게 책정하는 바람에 의사들의 연구 의지가 1990년대에 비해 상당히 침체돼 있습니다.”

이병인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의’ 가족이다. 부친은 한국 최초로 ‘의학대사전’을 만든 약리학의 선구자 이우주 전 연세대 총장(2007년 작고), 큰누이는 이화여대 의대를 졸업한 이영진씨, 동생은 박근혜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이병석 연세대 의대 학장(산부인과), 매제는 ‘칼을 쓰지 않은 위암 수술의 대가’로 알려진 노성훈 연세암병원장(외과)이다.

인제대 의대 석좌교수로 임명된 이병인 교수는 10월 초부터 인제대 해운대백병원에서 뇌전증센터장으로 제2의 의료인 인생을 걷는다.

이병인 교수는 “25년 전 뇌수술을 받고 완치된 여성분이 추석 직전 환갑잔치 동영상을 보내왔다”면서 “20년 이상 함께한 환자분들을 두고 부산으로 내려간다고 하니 환자들이 꿈에 나타날 정도로 염려가 된다”며 미안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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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룡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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