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몇 개 올라가 현관으로 들어서면 비좁은 로비가 나타난다. 장갑을 낀 채 스카프를 두른 여성들이 일제히 현관 쪽을 응시한다. 몇몇 남성도 보인다. 날씨가 추울 때는 20명가량이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서 있을 데가 없으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 있기도 한다. 현관 로비 뒤쪽에는 연하장과 카드를 줄에 매달아 파는 게 보인다.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연하장을 고르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다 약속한 사람이 나타나면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그리곤 몇 마디 주고받고는 금방 밖으로 나간다.…

1970~1980년대 겨울의 종로서적 1층 현관 로비 풍경이다. 이 시기 서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종로서적과 관련된 추억이 최소 한두 개쯤은 있을 법하다. 종로서적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을 나오자마자 있어 만남의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종로 2가가 젊음의 거리로 명성을 날리던 시절, 종로서적은 ‘책과 만남’의 명소였다. 휴대폰이 없던 그 시절 젊은이들은 으레 종로서적에서 만나 뒤편 관철동의 커피숍이나 레스토랑으로 옮겨갔다. 관철동에는 반쥴, 파인힐, 토요일, 템프테이션 등이 종로를 대표하는 레스토랑이었다. 벽돌 외벽의 반쥴은 1970~1980년대 정주영, 김영삼 등 정재계 거물들이 애용하는 장소였다. 파인힐은 피아노의 선율이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 맞선 장소로도 유명했고, 템프테이션은 패션모델 하용수가 디자인하고 운영한 덕분에 연예인들 출입이 잦았다. 1981년 교보문고가 문을 열고 나서도 종로서적의 명성은 한동안 흔들리지 않았다.

종로서적이 경영난을 이유로 문을 닫은 게 2002년이다. 온 나라가 월드컵 열기에 들떠 있을 때여서 종로서적의 폐업은 그리 큰 연민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종로서적은 1907년 기독교서점으로 시작했다. 창립 110년이 되는 해에 종로서적이 부활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주인은 원래 종로서적을 운영하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 장소도 대각선 방향에 있는 폐업한 반디앤루니스 자리다.

학생들의 몸집을 키운 것은 밥이지만 정신세계는 종로서적의 책이 살찌웠다. 종로서적은 지식과 교양의 샘터였다. 우리나라 지식인 중에서 종로서적에서 지적 자양분을 흡입하지 않은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외국 여행을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 종로서적은 세계로 난 유일한 창(窓)이었다. 종로서적에서 지식인들은 파리 생제르맹 거리의 카페 되마고와 플로르를 꿈꿨다.

나도 종로서적에서 꽤 많은 책을 샀다. ‘스페인 내전 연구’를 어렵게 구한 뒤 희열을 느꼈던 곳도 종로서적이었다. 겨울방학 때 비좁은 소설코너에 기대어 추리소설을 공짜로 다 섭렵하기도 했고,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에게 고은 시인의 ‘사랑을 위하여’를 선물하며 가슴 설렌 적도 있다.

프랑스 파리에는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라는 아주 낡고 오래된 서점이 있다. 지식인들이 대를 이어 애용하는 지성의 발전소다. 물론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분점이 없다. 오직 파리 한 곳에만 있다. 종로서적은 종로거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켜져야 할 이름이다. 연대생들이 신촌역 3번출구의 홍익서점을 지켜냈듯 서울 시민들이 종로서적을 지켜내야 한다.

종로서적은 지성의 본향(本鄕)이다.

키워드

#편집장 편지
조성관 편집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