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새해가 되면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 있다. 영어학원이나 헬스클럽 같은 곳이다. 올해는 영어회화 레벨을 상급까지 반드시 올려서 부장 앞에서 보란 듯이 미국 거래선과 유창하게 영어로 대화를 하겠다. 올해는 퇴근 후 술 약속을 만들지 않고 최소 사흘 이상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을 해 몸을 만들겠다.

새해 들어 가장 자주 인용되는 사자성어가 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다. 1월 말쯤 되면 대체적으로 새해 첫날의 다부진 결심이 무뎌지고 흐물흐물해진다. 1월 말이 되면 새해가 더 이상 새해처럼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작심삼일’이라는 사자성어가 회자되는 까닭은, 그만큼 새해 첫날의 초심(初心)을 끝까지 지키기가 힘들다는 뜻이리라.

나는 올해 아주 특별한 결심을 했다. 몸을 쓰는 게 아니라서 적어도, 작심삼일은 될 것 같지 않다. 그것은 영화관에서 끝까지 앉아 있겠다는 결심이다.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ending credit)가 올라가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영화관을 나서겠다는 다짐!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내가 SNS의 찰나적 여론에 휩쓸리지 않고 엄밀한 기준으로 주체적으로 선택해 돈을 지불한 영화일 경우에 한해서다.

영화가 끝나 스크린에 ‘The End’가 뜨면 관객들은 대부분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일어선다. 주인공 이름과 연기한 배우 이름이 막 올라갈 때 이미 관객의 절반 정도가 극장을 나간다. 도대체 뭐가 저리 급할까.

저예산 영화의 경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데 30초도 안 걸린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경우,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는 데 길게는 5분여까지 걸리는 경우도 있다. ‘닥터 스트레인지’와 같은 마블 시리즈가 여기에 해당한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영화 ‘라라랜드’를 보았다. ‘라라랜드’는 지난해 내가 미혹에 빠져 잘못 선택했던 몇몇 영화들에 대한 찝찝한 뒷맛을 상큼하게 보상해주고도 남았다. 그런데도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라라랜드’의 엔딩 크레디트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도중에 일어섰다. 뒤를 돌아보니 10여명이 끝까지 자리를 지킨 채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 때문이었을까. 집에 돌아와서도 찜찜했다. 그깟 2~3분이 뭐라고? 나는 왜 좋은 영화에 대한 경의(敬意)를 표하지 않았을까.

영화는 종합예술이다. 음악, 무용, 미술, 분장, 조명 같은 전통적 예술장르부터 첨단 테크닉인 CG, 3D, 특수촬영, 특수효과 등이 총동원된다. 영화판에서 제작자, 프로듀서, 감독, 주연배우, 조연배우 등은 갑(甲)에 해당한다.

스포트라이트 뒤에는 성공을 빛나게 하는 조력자들이 존재한다. 열악한 여건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이다. 이들은 영화판에서 을(乙)과 병(丙)에 해당하지만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다. 이들의 존재는 오로지 엔딩 크레디트에서만 확인된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영화판은 꿈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인재들이 몰려드는 분야다. 컴퓨터그래픽을 배워 유명 영화사에 디자이너로 들어가려면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이 필요한가. 누구라도 그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들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읽어주는 게 지식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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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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