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젠더(gender·性)의 관점에서 들여다보자. 인류 역사는 지독한 남성 중심의 역사였다. 여성을 사람 취급하지 않던, 여성차별의 역사였다.

여성이 각료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프랑스와 스웨덴 같은 선진국에서도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성차별이 극심했다. 19세기 중반 평민 여성들은 대부분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문맹(文盲)이었다. 바느질과 하녀가 이들이 택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여성이 대학에 진학하면 별종 취급을 받았다. 하물며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우리가 책에서 배워온, 그래서 의심할 바 없이 숭배해온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히포크라테스, 키에르케고르 등은 알고 보면 철저한 성차별주의자였다. 이들은 해괴망측한 논리로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했다.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여성차별에 대해 도전장을 던진 대표적 인물이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와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였다. 팽크허스트는 1912년 런던에서 여성참정권 운동을 전개했고, 보부아르는 파리에서 1949년 ‘제2의 성’을 통해 혁명을 선언했다. 유럽과 북미의 경우 2차 세계대전 이후 사실상 여성차별의 장벽이 무너졌다. 그러나 이슬람권은 여전히 여성에게는 암흑이다.

나는 1997년에 ‘딸은 죽었다’라는 책을 썼다.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피를 토하듯 쓴, 여성차별 고발서였다.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이후 20년이 흘렀다. 한국은 그 사이 IMF 외환위기를 거쳐 인터넷 시대가 전개되었다. 여성의 사회참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모든 면에서 2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남성의 의식은 어떤가. 남성의 의식 변화는 거의 정체 상태나 다름없다. 세상의 변화를 전혀 따라가지 못한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양성평등지수는 아랫목만 겨우 미지근할 정도이고 윗목은 차디찬 얼음장이다.

여기에 덧붙여 주목할 게 독신자 차별이다. 같은 독신이라도 남자와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하늘과 땅 차이다. 독신여성에 대한 차별은 이루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다. 독신의 삶은 곧 수난의 연대기(年代記)이다.

최근 나는 최순실 사건 관련 보도를 접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여성이면서 독신자’이기 때문에 실제 잘못 이상의 과도한 비난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방송은 미용사가 대통령 순방 때 대통령 전용기에 탔다고 공격했다. 역대 대통령 시절에도 남녀 미용사가 해외순방에 동행했는데도 말이다. 청와대 관저 반입 의약품 관련 보도가 방송 뉴스와 종편 프로그램을 도배할 때였다. 전직 대통령의 부속실장을 지낸 인사와 식사를 했는데, 그는 “역대 대통령 때도 대부분 저렇게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기자들이 검사가 말하는 대로 받아 쓴다”고 혀를 찼다. 지난 4개월간 인격살인에 해당하는 출처불명의 기사가 ‘단독’으로 포장되어 회자됐다. 여전히 종편의 출연자들은 이죽거리며 대통령을 희롱한다. 남자 대통령이었어도 그랬을까.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이 전시한 ‘박근혜 더러운 잠’이 바로 여성에 대한 집단적 때리기의 결정판이었다. ‘대통령 누드화’는 결코 우연히 나온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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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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