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은 청나라도 일본도 아닌 한반도 조선 땅에서 일어났다. 청일전쟁 직후인 1894년 8월 4일자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는 이렇게 보도했다.

“조선은 동아시아의 큰 반도이며 중국의 황해와 일본열도 사이에 위치한 북태평양 국가로, 몽골리안 종족의 단일민족으로 격리되어 있다. 이들을 야만족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현대 문명을 가장 적게 받은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지구상에서 이만 한 크기 지역 가운데서 유럽의 진보적인 영향에서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이 나라는 과거 수세대 동안 외국과의 모든 상업적 교류를 거부해왔으며 주변 강대국들의 사상과 관습에 대해서도 저항해왔다.”

당시 대영제국은 세계 전역에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 대영제국에서 나온 조선에 관한 보도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무나 객관적이고 정확한 분석이어서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실에 입각한 냉정한 분석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지난 12년간 ‘도시가 사랑한 천재들’ 시리즈를 쓰면서 18~20세기 중반의 유럽사를 개관했다. 오스트리아·체코·영국·러시아·프랑스에서 책으로 배운 역사적 현장을 발로 확인하고 가슴으로 느꼈다. 18~20세기는 전쟁의 역사였다. 특히 19세기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서구 열강들은 국부(國富) 증강을 위해 누가 더 많은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느냐로 경쟁을 벌였다. 실제로 나는 2010년 여름, 영국 외무성에서 대영제국 시절의 전쟁상황실(war room)을 견학했다. 대영제국의 ‘워룸’에서 나는 조선이 처한 세계사 속의 좌표를 확인했다.

19세기 조선을 보자. 왕권은 순조-헌종-철종-고종으로 이어졌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조선조 500년사에서 가장 무능했던 왕들이었다. 약육강식의 파고(波高)가 쓰나미처럼 아시아 대륙을 덮칠 때 조선에는 가장 유약한 리더십이 있었다. 19세기 조선사를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조선은 나라가 아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일본과 청나라에 부녀자들이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도 각성을 하지 않은 게 조선의 사대부들이었다. 우리는 임진왜란 당시의 이순신과 거북선을 칭송한다. 그러나 이순신이 죽자 그걸로 끝이었다. 유성룡의 ‘징비록’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선조가 진정한 지도자였다면 ‘징비록’을 읽히고 거북선 건조기술을 계승·발전시켜 조선을 해양강국으로 변모시켰을 것이다. 그랬다면 조선이 일본을 식민지로 삼았을 수도 있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그게 정의였다.

지금 세계의 부국들은 대부분 1820년 무렵에 이미 부유한 국가 대열에 합류했다. 이를 세계사적 대분기(大分期)라 부른다. 1868년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국가 개조를 위해 메이지유신을 단행할 때 조선의 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처자들이 능욕을 당한 것은, 한마디로 조선 남자들이 못나서다.

독립한 지 7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아직도 ‘친일’ 타령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일본을 욕하는 것으로 위안을 받으려는 퇴행적 심리에 편승하면서 입으로는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한다.

공자는 말했다. “過而不改, 是謂過矣(잘못을 저지르고서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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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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