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다정하다. 봄이다. 기어코, 봄이 오고야 말았다. 봄을 이기는 겨울이 없다더니….

겨울은 그냥 순순히 물러나는 법이 없다. 몇 번 심술을 부린다. 겨울이 완전히 퇴각하기 전에 한두 번 심통을 부린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일까. 언제 꽃샘추위가 다가온 봄을 되돌린 적이 있던가. 제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코트 깃을 세우게는 할지언정 봄볕을 가리진 못한다.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겨울 한복판을 걸어 퇴근할 때마다, 눈 덮인 산길을 비틀거리며 걸을 때마다 자문하곤 했다. 과연 이번에도 봄은 찾아와줄 것인가. 도저히 겨울이 물러가지 않을 것만 같다. 빨리 봄이 오면 좋으련만. 그럴수록 겨울의 발걸음은 무겁다.

산을 좋아하는 산사람들은 이미 험준한 산에서 봄이 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둔감한 나는 야트막한 앞산에서도 봄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 지난 봄 진달래를 피워냈던 그 가녀린 나뭇가지에서도, 숲속 오솔길의 이팝나무에서도 나의 오감각은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 연두의 기미를 살피는 것은 지렁이 울음을 듣는 것과 비슷하다고 노래한 어느 시인이 생각난다.

봄은 어떻게 오나? 2월 중순 토요일 아침이었다. 거실에서는 적요(寂寥)가 흘렀다. 노트북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 그때였다. 한 뼘만큼만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 이 낯선 소리가 뭔가 했다. 앞산에서 나는 소리를 멀리 공사장에서 나오는 소음 정도로 생각했다. 어느 순간, 그 소리가 낯익게 느껴졌다. 가만, 이 소리는? 나는 노트북을 덮고 후다닥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딱따구리, 딱따구리였다. 딱따구리가 돌아온 것이다. 지난 봄철 내내 온 산을 부르르 떨게 했던 딱따구리가. 딱따구리는 초여름부터 자취를 감췄었다. 나는 그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그는 계절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야트막한 숲속에 딱따구리가 돌아오니 다른 새들도 일제히 툴툴 털고 일어난다. 하긴 그 요란한 나무 쪼아대는 소리에 어떤 새들이 둥지에 잠자코 버틸 수 있을까. 산은 무대고, 봄볕은 조명이고, 산새는 주연이다. 딱따구리는 산새를 지휘하는 연출가의 큐사인이다. 조명이 켜지고 연출가의 큐사인이 나오면 새들은 봄맞이 공연을 시작한다. 참새는 참새대로, 박새는 박새대로, 직박구리는 직박구리대로 제각각 노래를 부른다. 뒤죽박죽 독창(獨唱)이다. 이쪽에서 직박구리가 한번 지줄대면 저쪽 어딘가에서 박새가 화답으로 ‘지줄대는’ 것 같다. 산은 봄맞이로 시끄럽다. 그러나 즐거운 소음이다. 새들이 까불고 노는 중구난방 합창(合唱)이 꼭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겨우내 참았다 여울져 흐르는 계곡물 소리 같기도 하다. 새들은 몸집과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소리도 제각각이다. 산새들이 노래할 때 숲은 비로소 기지개를 켜고 봄맞이를 준비한다. 산에 산새가 살지 않는다면 그건 산이 아니다. 그런 산에는 봄이 오지 않는다.

따스한 햇살에 간간이 졸아주는 것은 잊지 않고 찾아준 봄에 대한 예의다. 봄볕에 살짝 졸아주는 것은 순리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우주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쇼팽의 ‘봄의 왈츠’를 유튜브에서 찾아 듣는다. 볼에 닿는 햇살이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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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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