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인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20세기 영웅. 그가 잠들어 있는 가족묘에는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처칠이 없었다면 영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처칠이 태어난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그가 남긴 흔적을 찾아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을 순례한 경험이 있다. 블리츠(Blitz·런던대공습) 당시 처칠이 사용한 지하벙커도 가 보았다. 그는 스물여섯 살이던 1900년에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의원내각제에서 선수(選數)를 쌓아가며 통상부·식민부·해군부·군수부·공군부 장관을 두루 경험했다. 처칠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1940년 영국 총리가 되면서부터. 얼핏, 그는 승승장구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정치에 뛰어들기 전 여러 전쟁에 참전했다. 남아공 보어전투에서는 포로로 잡혀 죽을 고생을 하다 기적적으로 탈출했고, 쿠바의 반(反)스페인 반란에 참전해서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처칠의 결정적 실패는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3월의 갈리폴리전투. 해군부 장관 처칠의 만용(蠻勇)으로 연합군 25만명이 몰살을 당했다. 러셀 크로가 주연한 영화 ‘워터 디바이너’가 바로 갈리폴리전투가 배경이다. 패전 책임으로 처칠은 장관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백의종군하면서 기회를 노렸지만 연거푸 세 번 낙선하자 처칠은 끝났다고 모두가 말했다. 히틀러가 집권하자 처칠은 히틀러가 재무장을 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귀담지 않았다. 트로이의 카산드라 취급을 받았다. 결국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자 영국인은 처칠을 불러냈다. 나이 예순여섯. 전체주의의 악마성을 꿰뚫어보고 자유는 전쟁을 각오해야만 지킬 수 있다는 처칠의 신념이 마침내 파시즘을 이겼다. 처칠의 신념은 어디에서 나왔나. 풍부한 독서, 기독교 신앙, 생사(生死)를 오간 참전 경험, 정치인으로서의 영광과 좌절 등을 통해 내면화된 것이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1875~1965). 배재학교를 졸업한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 독립협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5년7개월간 혹독한 옥살이를 한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워싱턴대와 하버드대를 거쳐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1919년 이후 이승만은 26년간 미국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김구는 중국에서 세계를 봤지만 이승만은 미국에서 세계를 읽었다. 지리적 상상력이라는 측면에서 두 사람의 세계관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승만이 좌익이 판을 치던 해방정국 한가운데 귀국했을 때 나이 일흔. 노회한 전략가 이승만은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一國 社會主義) 노선을 꿰뚫었고, 김일성이 스탈린의 꼭두각시임을 파악했다. 1948년 4월, 이승만과 김구가 각각 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면 국제 정세를 읽는 수준 차이를 절감한다.

대선을 앞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잔악한 북한정권과 대치 중인 대한민국의 지도자는 백전노장의 통찰력이 필수다. 공산정권의 정체를 꿰뚫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사람! 얼치기 이상주의자는 큰일난다.

120년 전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갈파했다.

“인간은 탁한 강물이다. 이 탁한 강물을 스스로 더럽히지 않고 받아들이려면 자신이 바다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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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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