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드 발자크, 마르셀 프루스트, 오스카 와일드, 살바도르 달리,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프레드릭 쇼팽, 에디트 피아프, 이브 몽탕·시몬 시뇨레, 짐 모리슨…. 문학·회화·음악·영화 등의 분야에서 불멸의 업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살았던 시대가 다른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묘지인 페르라세즈(Pére-Lachaise)에 영면하고 있다는 사실. 이 유서 깊은 묘지는 지하철 ‘페르라세즈역’에서 3분 거리에 있다.

페르라세즈 묘지 정문 앞에는 꽃집과 함께 식당이 여러 개 있다. 그중 유명한 식당이 ‘롱프앙(Au Rond Point)’이다. 홍합 요리와 치킨 요리로 인기가 높다. 식당에 앉으면 정면으로 묘지의 담장이 보이고, 담장 너머로 죽은이들의 마지막 메시지들이 삐죽삐죽 솟아 있는 게 보인다. 이 식당은 언제나 손님들로 넘쳐난다. 위치도 좋은 데다 음식 맛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이다.

프라하성(城)은 구시가광장과 함께 프라하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여행객들은 비투스성당을 거쳐 카프카가 글을 썼던 비좁은 황금골목길을 구경하고는 계단을 따라 프라하성을 빠져나온다. 그런데 출구를 내려가다 보면 맨땅 위에 설치된 예술작품과 맞닥뜨린다.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고, 그 등판 위에 해골이 얹혀져 있다. 한국인의 눈에는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작품명은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우리가 유대인의 가정교육과 관련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가 있다. 유대인 부모는 아이들을 잔칫집보다 상갓집에 자주 데리고 간다. 다른 이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어서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는 파리 관광 상품에 ‘묘지 순례’가 일정으로 반드시 들어간다. ‘묘지 순례’는 여행의 중요 일정이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다. 나는 낯선 외국 도시를 여행할 때마다 중심가에 있는 대표적인 묘지를 찾곤 한다. 캐나다 북극의 준주(準州) 누나부트에서도 눈 덮인 공동묘지를 거닐며 앞서간 타인의 죽음을 살펴본 경험도 있다.

‘명상록’을 남긴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인생을 기나긴 항해(航海)에 비유했다. 예정된 항해가 끝나면 누구나 항구에 내려야 한다. 그게 곧 죽음이다. 항구에서 내려온 곳으로 돌아가는 여정과 함께하는 공간이 장례식장, 화장장, 납골당, 공원묘지다. 인간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 누구도 이 시설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시설을 혐오시설로 규정하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아마도 이런 공간을 혐오시설로 낙인찍는 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장례 관련 시설을 반대하는 이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죽으면 어디로 가나?” 최근에는 반려동물 장례식장까지 혐오시설로 반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매년 15만마리의 주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왜 우리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게 죽음의 존재인데. 죽음을 기억하지 않고 살면 삶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개개인이 모여 이루는 사회는 뿌리가 얕은, 부박(浮薄)한 사회가 된다.

바람만 불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휩쓸리며 부화뇌동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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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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