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 형사9부는 최근 고교 시절 여중생들을 집단 성폭행했다가 5년 만에 범행이 드러난 가해자들에 대한 항소심에서 1심보다 형량이 높아진 징역 6~7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기록을 읽어 보면 분노가 치밀어 이게 과연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생각했다”며 “어린 여중생을 밤에 산속으로 끌고 가 자신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옆에서 강간하는 행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질타했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줄 서서 강간하려고 기다렸다는 기록을 보며 위안부 사건이 생각났다. 몇십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며 “그런 짓을 하고도 (피고인들은) 웃고 떠들고 지내왔을 것”이라고 밝혔다.

나는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여성특별위원회(여성가족부 전신) 자문위원을 지냈다. 1997년 ‘딸은 죽었다’라는 성차별 고발서를 쓴 것이 계기가 되었다. 자문위원 중 여러 명이 국회의원으로 나갔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페미니스트여서도, 좌파학생운동을 했기 때문도 아니다. 딸을 생각하는 순수한 정의감의 발로에서 기자적 양심에 따라 썼을 뿐이다.

한국 남자 중 성평등 문제에 가장 앞서 있던 인물은 15대 대통령 김대중이다. DJ는 야당 지도자 시절부터 동교동 자택에 김대중·이희호라는 문패를 나란히 걸어두었다. DJ는 집권 후 성차별을 깨려는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청와대 총무비서관에 여성을 기용했고 최초의 여성 총리를 지명하기도 했다. 통역보좌관으로 강경화를 발탁한 사람도 DJ였다. 여성특별위원회를 신설해 여권 신장을 위한 제도 정비에 힘썼다.

그 후 20년이 흘렀다. 한국 남자의 성평등 의식은 지금 어디까지 왔나? DJ정부 때보다 후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고법 재판에서 형이 확정되자 일부 피고인 부모가 “젊은애들이 뭔 잘못이 있냐”며 항의를 하기도 했다. 또 얼마 전에는 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 남학생 9명이 여교사 앞에서 집단 자위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지금, 우리는 이런 나라에 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주변에서 벌어지는 성차별과 여성비하는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다. 성적 상상과 판타지는 자유다. 누구든 뭐든지 상상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머릿속 생각을 활자로 옮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활자는 무섭다. 법무장관 후보자에서 사퇴한 안경환씨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청와대 선임행정관 탁현민씨가 배설해놓은 활자들은 언급하는 것 자체가 민망스러울 정도다. 도대체 두 사람은 그런 생각을 어떻게 활자로 길이 남기겠다는 발상을 할 수 있는지…. 급기야 여성단체들도 들고일어났다. 6월 22일 여성단체협의회는 성명을 통해 탁현민 행정관의 사퇴를 촉구했다.

“탁현민 행정관이 저서들을 통해 쏟아낸 심각한 성 발언과 여성을 오직 성적 대상으로 비하한 왜곡된 성의식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의 언행이 아무리 과거지사라 할지라도 공직자로서 품위손상을 말할 것도 없고 공직을 수행할 자질도 크게 의심할 수밖에 없다.”

지금 청와대에는 과거 전대협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하던 인사 10여명이 비서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여성비하는 진보적 가치에 부합하는 것인가.

여성비하는 최상위 적폐(積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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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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