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우표 발행 취소를 둘러싸고 이를 비판하는 기사들이 잇따르고 있다. 우표 발행 취소를 비판하는 기사나 칼럼을 인터넷에서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댓글에 눈이 가게 마련이다.

댓글은 그 숫자에 관계없이 박정희(1917~1979)를 비난하는 내용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댓글의 표현과 수준이 상스럽고 저급해서 괜히 봤다 싶지만 꾹 참고 읽어내려 갔다. 인내심을 갖고 읽다 보니 어느 순간 어떤 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패턴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박정희가 친일(親日)을 했다는 것이다. 댓글에서 제시되는 증거는 이런 것들이다. 박정희가 젊은 시절 창씨개명해 다카기 마사오로 살았다. 그리고 만주군관학교에서 일본 황제에 충성맹세를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광복 후 박정희가 좌익운동을 했다는 사실과 1979년 여자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부하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모두 다 사실이다. 박정희는 창씨개명을 해 다카기 마사오로 일제강점기를 살았다. 대구사범학교를 나온 뒤 교사를 하다 나폴레옹을 가슴에 품고 군인이 되기 위해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일본이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사관생도로서 당연히 일본 황제에 충성맹세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일본 국적이었으니까. 좌익이 판을 치던 해방정국에서 박정희는 남로당 지하조직에 가입했다. 형 박상희의 영향으로 감상적 사회주의에 기울었던 결과다. 또 1974년 부인 육영수를 잃고 나서 밤에 종종 술자리를 가졌다.

그가 태어난 출생연도를 기억해두자. 1917년. 그가 태어났을 때 한국은 없었다. 일본인으로 살도록 교육받았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치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 시대에 태어난 한국인 대다수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일본인으로 광복될 때까지 살았다. 1915년생 미당 서정주도 그랬다. 이게 박정희가 민족 반역자라는 논리다.

이들의 비방 논리는 거북하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다. 너무나 익숙하다. 그렇다. 2012년 대선 때 통진당 후보로 나왔던 이정희가 방송토론에서 앵무새처럼 읊었던 내용들이다. 이것은 또한 전교조 교사들이 순진한 어린 학생들을 세뇌시켜 대한민국을 부정하게 만드는, 진부한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박정희 전기’(전13권)를 읽으면서 궁금한 게 있었다. 일본군 장교 박정희는 만주와 중국 일대에서 복무하면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박정희는 당시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대구사범 출신이었다. 보통 장교와는 달랐다. 1930~1940년대 만주는 한국인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만주 러시가 이어졌다. 1930년대 진방남이 부른 ‘꽃마차’는 만주 러시를 배경으로 나온 노래다. 소련과 인접한 만주와 중국에서는 제국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와 같은 다양한 이념이 각축을 벌였다.

박정희는 당대의 정치인들과 경험의 폭과 깊이에서 차이가 났다. 박정희는 산전수전도 모자라 공중전까지 경험했다. 지옥의 문 앞까지 보고 온 파란만장의 삶이 ‘선(先)산업화-후(後)민주화’라는 신념으로 발현되었다. 2차 대전 후 독립한 신생국들 중 산업화 없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인 국가들을 보라. 삼성·현대차·SK·LG·롯데·포스코·GS·한화·현대중·신세계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모두 박정희가 만든 토양에서 성장했다. 좌파들은 대한민국의 성공을 있게 한 그런 박정희가 미워죽겠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돌이켜보라. 얼치기 이상주의자가 나라를 구한 일이 있는가. 냉혹한 현실주의자만이 나라를 부강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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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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