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제정치 전문가들과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가지 화제가 오갔는데, 한 사람이 “지금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꿀꿀이죽을 먹고 있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동안 베네수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설마 꿀꿀이죽이야 먹겠는가 싶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더니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이끄는 베네수엘라는 지금 국가 기능이 마비되어 국가 부도 일보 직전이다.

남미의 베네수엘라는 6·25전쟁 때 한국에 물자를 지원했다. 그 이후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 우고 차베스(1954~2013)로 인해 베네수엘라는 한동안 국제 뉴스에 자주 오르내렸다. 차베스가 대통령직에 오른 게 1999년. 차베스는 이후 4선에 성공하며 2013년까지 14년간 장기집권했다. 그는 어떻게 14년간 지배했을까. 베네수엘라는 석유 매장량 세계 1위다. 차베스는 수출액의 80%에 달하는 오일달러를 이용해 무상교육·무상의료와 같은 산타클로스 복지를 펼쳐 빈민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차베스는 남미 사회주의 지도자를 자처하며 반미(反美)를 부르짖었다.

차베스가 한국 언론에 집중 조명된 기간은 노무현 정부(2003~2008) 시절이다. 2006년 KBS 스페셜은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차베스의 도전’이라는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KBS 스페셜은 차베스의 좌파 포퓰리즘과 반미주의를 한국이 배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 언론이 차베스의 좌파 포퓰리즘이 결국 베네수엘라를 망가뜨려 수렁에 빠지게 할 것이라는 경고를 보낸 것과는 정반대였다. 이 프로그램은 일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어떤 네티즌은 자신의 블로그에 “우리에 비해 물질적 부가 떨어질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정신세계는 우리를 서서히 앞서 나갈 수 있다”라는 글을 올렸다. 좌파 인사들도 앞다투어 차베스를 찬양하는 글을 좌파 미디어에 기고했다. 노무현과 차베스를 동일선상에 놓고 평가하는 칼럼을 쓴 사람도 있었다. 차베스의 국가주의를 찬양하는 책들도 쏟아져 나왔다. ‘차베스, 미국과 맞짱 뜨다’ ‘민중의 호민관 차베스’ ‘사회주의는 가능하다’…. 이런 책들에 대한 서평도 차베스 찬양 일색이다. 어떤 서평은 차베스를 가리켜 ‘앞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돈키호테 같은 사람으로 보겠지만, 그는 미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서 민중을 해방시키고 있는 위대한 혁명가이다’라고 썼다.

노무현 정부 시절 경쟁적으로 차베스를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침을 튀겨가며 얘기했던 인사들은 지금 베네수엘라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누구도 “내가 잘못 판단했다”고 사과한 사람이 아직까지 없었다. 참으로 뻔뻔하다.

‘차베스 찬양’ 외에도 좌파 포퓰리즘이 사회혼란을 부추긴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봄의 이른바 ‘광우병 파동’이 대표적이다. MBC PD수첩은 미국산 쇠고기를 ‘광우병 쇠고기’로 왜곡·조작해 방송했다. 힘없이 픽픽 쓰러지는 미국 소를 시청한 주부들과 중고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TV와 인터넷은 이를 생중계하며 광화문 일대를 반미·반정부 해방구로 만들었다. 급기야 이런 분위기에 들뜬 여배우 김민선씨는 미니홈피에 “광우병이 득실거리는 소를 먹느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입안에 털어넣겠다”는 ‘어록’을 남겼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 2기(期)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국가주의 포퓰리즘을 보면서 베네수엘라 국민이 떠올랐다.

키워드

#편집장 편지
조성관 편집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