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편집장레터
[2476호] 2017.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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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편지] 고향, 그 영원한 그리움

조성관  편집장 maple@chosun.com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문상을 갈 때마다 정주영(1915~2001)을 생각하게 된다. 장례식장 로비에는 아산의 흉상이 놓여 있다. 서울아산병원을 보면 그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나는 생전의 아산을 여러 번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 그에 대한 감회가 조금은 각별하다. 새벽녘 청운동 자택에서 함께 탄 쏘나타 승용차 안에서 잡아 보았던 두툼하고 따스했던 손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정주영을 실감하게 된 것은 1989년 울산에서였다. 현대중공업 파업사태를 취재하러 내려갔다가 조선소 구석구석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자동차로 한참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기업가 정주영을 다시 보게 되었다.
   
   정주영이 농사를 지으라는 아버지를 거역하고 이향(離鄕)하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 것인가? 정주영을 생각할 때마다 혼자 떠올리는 질문이다. 정주영이 생을 받은 곳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만일 정주영이라는 불세출의 기업가가 없었다면 북한 지명인 아산(峨山)이 우리에게 알려졌을 것인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우리는 아마도 충무공 이순신의 외가인 충남 아산(牙山)만 기억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정주영은 고향마을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호(號)를 아산이라 정했을까. 이순신의 외가는 언제든 갈 수 있지만 정주영의 고향은 가볼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대한민국 곳곳에서 정주영의 고향과 맞닥뜨린다. 현대오일뱅크는 주유소 외벽에 “이봐, 해봤어?”와 같은 아산의 어록을 게시한다. 이렇게 아산은 노마드가 되어 세상을 주유(周遊)한다.
   
   어린이책 전문출판사 중에 비룡소라는 출판사가 있다. 비룡소는 민음사의 자회사로 1994년 설립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어린 시절 비룡소에서 나온 책을 최소 한두 권은 읽으며 자랐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육신의 밥은 엄마가 해주었지만 영혼의 밥을 먹여준 것은 비룡소였다. 여기서 궁금증이 인다. 왜 비룡소인가? 민음사 설립자 박맹호(1934~2017)의 고향은 충북 보은군 보은읍 장신리 비룡소. 이쯤 되면 독자들은 무릎을 칠 것이다. 비룡소(飛龍沼)는 비상을 꿈꾸는 용의 연못이라는 뜻이다. 나는 생전의 박맹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소년 박맹호가 발가벗은 채 비룡소에서 멱을 감고 물장구 치며 놀던 모습이 스르르 떠오르는 것만 같다. 동무들과 천렵하던 어린 박맹호도 보이는 것만 같다. 박맹호는 생전에 “붉은 대추가 주렁주렁 열리던 고향집과 가을 황금들녘에서 메뚜기를 잡던 어린 시절 고향 보은을 잊을 수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 비룡소라는 연못이 대한민국에서 어디 보은에만 있겠는가. 하지만 보은 출신 박맹호로 인해 장신리에 있는 비룡소가 비로소 세상에 그 이름을 드러내 의미를 갖게 되었다. 김춘수의 ‘꽃’처럼. 현재 비룡소는 설립자의 딸이 운영하고 있다. 출판사 스스로 문을 닫지 않는 한 비룡소는 50년 뒤에도 여전히 고사리손에 들려질 것이다.
   
   몇 해 전,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를 찾아간 일이 있다. 미당 서정주(1915~2001)의 동생인 서정태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미당은 선운리에 태를 묻었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선운리에는 미당 생가와 미당 박물관이 있다. 서정태씨는 이렇게 말했다.
   
   “4월 중순에 여기 오면 선계(仙界)가 따로 없어요. 예전에는 지금 논 있는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어요. 오죽하면 이 동네를 선운리라 했겠어. 신선 선(仙), 구름 운(雲)을 써서.”
   
   미당의 고향에 있는 절이 선운사다. 선운사를 가보진 않았어도 우리는 선운사를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시와 노래로 선운사를 되뇌거나 흥얼거리곤 한다. ‘선운사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로 시작하는 시 ‘선운사 동구’. 가수 송창식이 노랫말을 짓고 부른 노래 ‘선운사’는 이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 부안에서 선운리로 가려면 꼬불꼬불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질마재. 소년 서정주가 어린 시절 부모 손 잡고 숨을 헐떡거리며 넘었던 고갯길이다. 소년의 정서에 나이테처럼 아로새겨진 질마재길은 평생 미당을 맴돌았다. 미당은 시집 제목을 ‘질마재 신화’라고 붙였다. 미당 문학은 고향의 산과 들과 재와 바다가 피워낸 꽃이다.
   
   사리불(舍利佛)은 석가모니의 10대 제자 중 한 명으로 지혜가 가장 많은 사람이다. 사리불은 고향에 돌아와 자신이 태어난 방에 앉은 채로 입적(入寂)했다.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고, 그곳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기쁨. 인생의 시작과 끝을 연결할 수 있는 이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 이는 요한 볼프강 괴테다. 파리에서 눈을 감은 가수 마를렌 디트리히는 왜 죽으면 베를린 고향마을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을까.
   
   여행작가 눌산이 주간조선에 ‘이야기가 있는 소읍 기행’을 연재 중이다. 경남 산청 편을 읽다가 나는 귀향한 이현숙씨의 이야기에서 그만 울컥했다. 다른 사람 이야기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40대인 이현숙씨는 140년 된 서당인 학이재(學而齋)에서 태어났다. 이씨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면서도 태어난 집을 잊지 못하다가 수년 전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태어난 집으로 돌아와 살고 있다. 첫울음을 터트린 곳이 헐리지 않고 온전히 집으로 남아 기능하고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든 일인가. 더욱이 그 집의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현숙씨는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지른 그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고향은 출향인으로 빛을 본다. 권력자에 대한 미화는 단 한 줄이라도 두고두고 멍에가 되곤 하지만 고향에 대한 미화는 책 열 권을 써도 무죄다. 이 세상에 고향을 미화하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객지에 나와 성공하면 누구든 고향의 지명을 회사이름 같은 곳에 붙이고 싶어 한다. 자신이 다닌 초등학교 이름을 회사이름으로 정한 기업인도 있다. 저널리스트 김성우가 ‘돌아가는 배’를 쓰지 않았다면 누가 통영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욕지도를 욕지기를 참아가며 찾아가겠는가. 욕지도의 멸치와 고구마 맛을 누가 기억한다는 말인가.
   
   얼마 전 작고하신 장인은 황해도 은율이 고향인 실향민이다. 장인은 거실 탁자에 구월산이 보이는 빛 바랜 고향마을 사진을 끼워놓고 부모님을 그리워하곤 했다. 강산애가 부른 ‘~라구요’처럼 실향민의 정서를 절절하게 표현한 노래도 드물다. 죽기 전에 꼭 한 번만이라도 가봤으면 좋겠구나. 왜 실향민은 고향 생각이 나면 말 없이 소주를 찾는가. 정주영은 눈을 감기 직전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어릴 적 소꿉동무들과 뛰어놀던 아산리를 상상했을지 모른다.
   
   출향한 모든 이의 가슴에는 고향마을 동구 밖의 늙은 은행나무와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되어 있다. 평생 늘어나기만 하고 끊어지지 않는 고무줄! 소시(少時)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저장하고 있는 은행나무는 곧 고향이다. 독일 사람은 보리수나무에서 고향을 생각하지만 한국 사람은 은행나무에서 고향을 생각한다. 추석은 객지의 출향인에게 고향이 발부하는 소환장(召喚狀)이다. 타향에서 자랑스럽게 고향을 말할 수 있고, 소환장을 받으면 언제든지 고향으로 달려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1998년 소떼를 몰고 고향을 찾은 정주영을 생각해 본다. 아산이 아산리에서 정녕 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볕이 잘 들던 고향집 툇마루였을까, 아버지가 심어놓은 장독대 뒤의 감나무였을까, 아니면 남몰래 마음을 준 동네 처녀의 손톱 끝에 물든 봉선화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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