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카탈루냐와 털끝만큼의 인연도 없다. 이상하게 기회가 닿지 않아 카탈루냐는커녕 이베리아반도 한쪽 귀퉁이도 아직 밟아 보지 못했다. 그 흔한 깃발관광으로도.

물론 관념적으로는 카탈루냐 지방을 수없이 다녀왔다. 이십대 초반에 스페인내전에 심취한 적이 있었고, 오십대에 접어든 지금은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를 책상에 두고 틈날 때마다 읽는다.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 메시가 뛰고 있는 FC 바르셀로나를 좋아하고, 가우디를 키운 도시 바르셀로나를 ‘도시가 사랑한 천재들’ 후보 도시로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했다.

카탈루냐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든 남아 있든 솔직히 한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카탈루냐 분리운동을 보면서 어떤 기시감(旣視感)이 들었다. 그것은 20세기 말 캐나다를 골병들게 했던 퀘벡 분리주의 운동이었다. 나는 잠시나마 캐나다 전문가 대접을 받았던 적이 있다. 캐나다를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캐나다는 미국과 같은 영어를 쓰는데 왜 따로 있나요?’ 캐나다를 캐나다이게 하는 것은 퀘벡의 존재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품고 있기 때문에 캐나다는 미국과 다를 수밖에 없다.

캐나다 퀘벡은 20세기에 두 번 분리주의 운동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퀘벡 주의회선거에서 분리주의자 정당인 퀘벡당이 승리할 때마다 벌어진 일이다. ‘분리 반대’가 1980년 주민투표에서는 20% 차로, 1995년 주민투표에서는 1% 차로 각각 ‘분리 찬성’을 눌렀다. 퀘벡주에는 통상 앵글로폰(영어사용주민)이 20%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코폰(프랑스어 사용 주민)이 절대 다수임에도 분리주의를 반대하는 연방주의자가 더 많아 퀘벡이 분리되는 것을 막았다. 그 배경에는 ‘캐나다 없이 퀘벡은 생존할 수 없다’는 명제에 프랑코폰이 동의했기 때문이다.

퀘벡의 분리주의 운동은 완전히 소멸되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게 현실적이다. 분리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계속 분리주의 운동을 일으켜야 정치자금이 모이고, 또 실제 분리했을 때 더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니 기회만 주어지면 분리를 주장한다. 분리주의자들은 끝없이 과거의 역사(1759년의 전쟁)를 상기시키며 영국계의 통치에 분노할 것을 자극해왔다. 1759년 퀘벡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프랑스 원군(援軍)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영국이 승리했고, 이로 인해 캐나다의 통치권은 영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경제적 요소다. 1980년 분리주의 운동으로 퀘벡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미래를 불안하게 여긴 부유한 앵글로폰이 탈(脫)퀘벡을 감행한 것이다. 그 결과로 몬트리올은 캐나다 제1의 도시라는 위상을 토론토에 넘겨주고 말았다. 사람의 이탈은 곧 자본과 두뇌의 이탈을 의미한다. 1995년 주민투표 과정에서도 퀘벡 경제는 또 한 번 속병이 들었다.

2017년 카탈루냐의 분리주의자들은 1995년 퀘벡의 분리주의자들과 생각이 다를까. 지역은 다르지만 속셈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진정 카탈루냐의 미래를 생각할까? 캐나다와 퀘벡의 관계를 설명하는 똑같은 논법을 적용해 보자. ‘스페인 없는 카탈루냐는 생존할 수 있을까.’ 극동의 국외자가 볼 때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분리주의 정치인들은 이게 가능하다고 주민들을 속인다. 카탈루냐 정치가 불안하고 경제가 악화될수록 주민들은 더 많이 카탈루냐를 떠날 것이다. 정치인들의 거짓말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 대가는 혹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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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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