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편집장레터
[2484호]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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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편지] 고추장찌개

조성관  편집장 maple@chosun.com 

일요일 저녁 식탁에 고추장찌개가 올라왔다. 어, 고추장찌개네. 그러고 보니 전날 택배로 온 CJ홈쇼핑 박스를 개봉할 때 청국장찌개 8봉지에 고추장찌개 2봉지가 들어있었던 게 생각났다. 한 숟갈 떠서 먹어 보았다. 얼큰하고 걸쭉한 국물이 목구멍을 넘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감격했다. 아~ 바로 이 맛인데. 무심하게도, 나는 너무 오랫동안 이 맛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고추장찌개를 흰쌀밥에 부어 쓱쓱 비벼 소파에 앉아 올레TV로 ‘물랑루즈’를 시청했다. 다른 반찬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땀을 흘리며 나는 니콜 키드먼의 열연(熱演)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깊은 안도감을 맛보았다. 어찌하여, 나는 스테이크도 아닌 고추장찌개에 이토록 감미로운 기쁨을 느낀다는 말인가.
   
   얼마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 늦은 점심을 해결하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진공포장된 볶음김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고민 없이 볶음김치를 집어들었다. 볶음김치를 개봉하려는데 봉지 속의 내용물이 ‘물컹’ 하는 느낌이 손끝에 전달되었다. 조심스럽게 봉지를 뜯었다. 볶음김치 특유의 향이 코를 찔렀다. 나는 식탁에 앉아 볶음김치를 흰쌀밥에 얹으며 행복해 했다.
   
   그런데, 이 볶음김치 냄새가 변연계에 있는 기억의 저장고를 열어젖혔다. 프루스트의 마들렌 과자처럼. 베트남전에 참전한 장군의 회고록을 읽은 게 되살아났다. 맹호부대 병사들이 미군 측이 제공하는 기름진 식사와 전투식량 C레이션으로 괴로워한다는 이야기가 사령관에 보고되었다. 사령관은 김치를 조달해 먹이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정부에 김치를 공수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치가 미군 수송기를 타고 베트남 땅에 내렸다. 그런데 날씨가 너무 따뜻하다 보니 김치가 발효되어 그만 쉬어 버렸다. 미군 장교가 이 김치를 보더니 코를 막고는 “썩은 야채”라며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맹호부대원들은 그 쉰 김치를 먹고 비로소 기운을 차렸다.
   
   볶음김치를 뜯으며 맡았던 ‘특유의 향’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에게는 역겨운 냄새일 수 있다. 김치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은 ‘썩은 냄새’라고 말하는 게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날씨가 추워지면 몸이 먼저 청국장을 원한다. 쿰쿰한 청국장찌개를 먹을 때마다 한국에 처음 와본 외국인을 생각해 본다. 그 외국인은 과연 이 냄새를 참아낼 수 있을까. 상하이 여성과 결혼한 지인은 아내가 다른 한국 음식은 다 잘 먹는데 된장찌개 종류는 여전히 힘들어 한다고 했다.
   
   작년 이맘때 시안(西安)을 단체여행한 적이 있다. 가이드가 시안의 특별식으로 만두전문집을 간다고 했을 때 만두 매니아인 나는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8~10종류의 만두 중에서 대부분 한입 베어 먹어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비위가 상해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한국 식문화의 베이스는 장이다. 된장·간장·고추장의 장(醬). 장은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쳐서 완성된다. 인류는 음식을 오랫동안 보관하고 더 맛있게 먹으려 절임, 염장, 냉장, 발효와 같은 방법을 개발해냈다. 발효 음식은 중독성이 강하다. 어느 나라건 그 나라 최고 음식은 발효식이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면 나또, 송화단, 치즈, 하몽, 살라미, 발사믹식초, 사워크라우트…. 네다섯 살에 유럽에 입양되어 성인이 될 때까지 한국 음식 근처에도 가 보지 않은 사람이 한국에 와서 한국 음식을 먹으면 편안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왜 그런가? 어려서 먹어 본 장맛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뇌리에 DNA로 각인되어서다.
   
   겨울이다. 겨울은 발효음식이 당기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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