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세계인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준 최초의 사건은 88서울올림픽이었다. 그전까지 한국은 6·25전쟁 당시 야전병원을 다룬 미국 드라마 ‘매시(MASH)’에서 그려진 것처럼 남루한 이미지였다.

하계올림픽의 하이라이트는 예나 지금이나 마라톤이다. 서울올림픽 당시 잠실주경기장을 출발한 마라톤은 강남 테헤란로~88올림픽도로~여의도~강북강변도로를 지나는 코스였다. 세계인은 마라톤 중계방송을 보면서 한국의 발전상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우리는 상상도 못 했지만 유럽 공산권 국가의 국민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울 잠실벌에서의 날갯짓은 1년 뒤에 공산권 붕괴라는 세계사적 전환점을 몰고 왔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것은 1981년 전두환 정부 시절이다. 대학가에선 대자보를 중심으로 올림픽과 관련한 온갖 그럴듯한 괴담들이 떠돌았다. 야당은 서울올림픽을 폄훼하고 과소평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서울올림픽 유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1979년 대통령 박정희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당시 박정희는 10년 뒤인 1988년이면 한국 경제가 탄탄한 기반 위에 올라서게 되므로 올림픽을 충분히 치러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전두환 정부는 박정희의 경제정책을 포함해 올림픽 유치계획도 그대로 계승했다. 대통령 전두환은 서울올림픽 유치위원회를 결성해 이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서울올림픽 유치의 최고 공로자는 누가 뭐래도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이었다.

88서울올림픽 다음으로 한국을 세계에 알린 대사건은 2002 한·일월드컵이다. 지금도 유럽에 가면 2002 월드컵의 열기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만큼 한국인이 표출한 붉은 열정은 이탈리아 애트나 화산처럼 강렬했다. 월드컵을 유치한 해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모두가 불가능하다던 2002 한·일월드컵을 유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축구협회장 정몽준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한 것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7월. 당시 유치위원장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었다. 한국은 불과 30년 사이에 스포츠 3대 메가 이벤트인 하계올림픽과 동계올림픽, 그리고 월드컵을 유치한 국가가 되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한국이 유이(唯二)하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는 분명 이명박 정부의 업적이다. 그러나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두 번의 실패가 밑거름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10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를 놓고 평창은 캐나다 밴쿠버와 최종 경합을 벌였지만 패배했다.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전에서는 러시아 소치와 막판까지 접전을 벌였지만 강대국 러시아에 밀려 석패(惜敗)했다. 그때 투표권을 가진 IOC위원들을 상대로 득표 활동을 하던 대통령 노무현의 모습도 생생하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유치는 국민이 하나로 똘똘 뭉쳐 불굴의 정신으로 일궈낸 것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라 안팎에서 들린다. 올림픽 같은 메가 이벤트는 국민의 마음이 합쳐져야 성공한다. 대기업의 협조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이 정부의 실세라는 사람들은 기업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검찰과 경찰이 경쟁적으로 대기업을 들쑤신다. 마치 서로 먼저 한 건을 잡고 말겠다는 듯 말이다. 검찰은 또 다른 전직 대통령까지 법정에 세우려 혈안이다. 전직 정보 책임자들을 줄줄이 구속해 나라 망신을 시키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다.

개막일은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손님을 맞아야 하는 국민은 도무지 신명이 나지 않는다. 평창 동계올림픽 홍보 슬로건은 ‘하나된 열정, 하나된 대한민국’이다. 정나미 떨어지게 하는 데는 정말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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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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