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편집장레터
[2462호]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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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편지] 콘서트와 전쟁

조성관  편집장 maple@chosun.com 

1990년대 초반 나는 북위 38도 선상에 있는 강원도 화천군의 마을을 1박2일간 취재한 일이 있다. 일흔 살이 넘는 마을 토박이 10여명을 만나 1950년 6월 25일 목격한 일들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들이 일제히 38선을 넘은 것은 새벽 4시가 아닌 새벽 2~3시부터였다고 했다. 한 노인은 초가집 옆으로 난 신작로를 행진해 남쪽으로 내려가던 인민군들을 잊지 못했다. 그 신작로는 아스팔트로 변했고 초가집은 함석지붕으로 바뀌었지만 그날 새벽에 벌어진 일들을 노인들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다.
   
   6·25전쟁 3년 동안 유엔군 4만896명이 전사했다. 이 중 미군의 숫자는 3만6492명. 부산 유엔군참전공원에는 영국·호주·캐나다·터키 등 11개국 전사자 2300명이 안장되어 있다. 1950년 7월 경남 하동에서 전사했지만 신원 확인이 안 되었던 마누엘 퀸타나 일병이 최근 고향 네바다주로 돌아갔다. 아직도 찾지 못한 실종자 유해가 수백 기가 넘는다.
   
   4만896명. 6·25전쟁 중 한반도 산하에서 산화(散華)한 유엔군 숫자가 4만896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한국인은 얼마나 될까. 1950년 당시 세계인은 한국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유 진영의 16개국은 아시아의 작은 나라 코리아에 전투병을 보냈다. 6·25전쟁은 미국·영국·캐나다의 신문 1면에 ‘Communist Invaded S.Korea’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자유 진영의 청년들은 한국이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 보고 자원 입대를 결심했다. 공산주의로부터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몇 해 전 중국 출장 중에 톈진에서 30대 초반의 중국 공무원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한국어가 유창한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6·25전쟁은 한국이 먼저 일으킨 전쟁이라고 태연하게 말했다. 처음엔 놀랐지만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중국에서는 6·25전쟁을 항미원조(抗米援朝)라고 칭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한의 침략에 맞서 조선을 구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중국인 대부분은 지금도 6·25전쟁을 한국이 북한을 침략해 일어난 전쟁으로 알고 있다.
   
   중국인들만 그런가. 세계의 좌익들은 지금도 모두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인의 존경을 받는 실존주의 철학자 겸 작가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그는 프랑스의 대표적 좌익 지식인이었다. 구체적으로 세분하면 그는 마오쩌둥주의자, 즉 마오이스트였다. 1960년대 말 그는 파리에서 좌익 잡지 ‘현대’를 창간해 마오이즘을 열렬히 전파했다. 그 역시 6·25전쟁을 한국의 북침(北侵)으로 알고 글을 썼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속아 넘어간 결과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지만 한국인 대부분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뭔지를 알지 못했다. 한국인은 6·25전쟁 중 UN군과 함께 피를 흘리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체득했다. 6·25전쟁을 통해서 한국인은 비로소 자유대한민국의 국민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6·25전쟁 당시 미2사단은 7094명이 전사했다. 의정부시는 최근 미2사단 창설 100주년 기념공연을 준비했으나 반미세력의 겁박과 훼방으로 무산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충일 추념사에서 6·25전쟁의 책임을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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