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전공수업 중에 ‘고전비평선독’이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고전을 번역하며 텍스트의 참맛을 느껴보자는 게 강의의 취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수업 교재를 받아든 첫날, 막막함이 눈앞을 가렸습니다. 원전을 한 줄 해석하기도 쉽지 않은데 시험을 치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대학 동기와 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수강 등록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듣게 된 강의는 하루하루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교수님의 말씀을 통해 죽어 있던 텍스트가 되살아날 때마다 가슴이 벅찼습니다. 강의를 듣지 않았다면, 교수님의 강해(講解)가 없었다면, 고려 문인 이규보의 ‘시벽(詩癖)’이 얼마나 멋진 작품인지 지금까지도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현대인들은 사실상 번역된 텍스트를 통해서만 고전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번역전문가에 대한 처우가 달라지지 않으면 번역 작업의 활성화는 불가능합니다. 지난주 ‘콘텐츠의 보고 고전번역’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번역 전문가에 대한 처우가 달라지면 인재가 모이고, 인재가 모이면 국학이 살아나고, 국학이 살아나면 한국 정신문화의 수준이 높아질 것이다”라고 얘기하더군요. 한동대 글로벌리더십학부의 김윤규 교수는 “번역 전문가가 1매에 1만2000원의 고료를 받는 것은 모욕에 가깝다. 고전번역에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한 관계자가 기자에게 한 말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지난 10월 전장(戰場)이 되게 마련인 국정감사에서 한국고전번역원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배석한 국회의원들 모두 번역원 예산 증액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여야가 한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곧 번역원에 대한 지원이 그만큼 절실하다는 것 아니겠느냐.” 이제 남은 것은 정부의 ‘통 큰’ 지원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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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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