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에게 사랑을 느끼면 만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70대 법조인 A씨가 속내를 털어놨습니다. 자신이 몸담았던 검찰 내 성추행 건에 대해 그리 생각한답니다. 2월 19일, 이윤택 기자회견에 다녀오는 길에 전화를 걸어본 참이었습니다. 이윤택 기소 여부에 대한 그의 의견이 궁금해서였죠. “소개로 만난 사이가 아니다. 같은 조직에서 월급을 받는 동료이자 후배다. 호감이 있더라도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는 방식은 안 되는 것 아닌가.” 기자의 반박을 그는 그닥 납득하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평소 그는 소수의 입장을 배려하는 비교적 전향적인 법의식을 지닌 인사였습니다. 그나마 이윤택에 대해선 비난을 아끼지 않는 데서 작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일이 터지고 보니 사방에 ‘목격자’들이 있었습니다. 언론사 문화부장을 지낸 선배기자는 권태로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고은뿐이 아니야. 아직 새 발의 피도 안 드러났다. 지금 핏대를 올리며 고은을 비난하는 남성 문인들 중에도 추행범이 여럿이다.” 베테랑 방송작가인 지인은 심드렁한 어조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성추행 에피소드를 대여섯 개 연속으로 늘어놨습니다. 이쯤되면 한국판 악(惡)의 일상성이라 할 만합니다. ‘왜 그때 기사로 안 썼어요? 왜 그 자리에서 항의하지 않았어요?’ 목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킨 건, 돌아보니 나 역시 자유롭지 않아서였습니다. “치마 입고 찾아오면 A학점으로 고쳐준다”는 교수의 말을 멀거니 듣고만 있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내가 정조준되지 않았단 이유로 일부 ‘아재들’의 성희롱을 무심히 대한 날들이 떠올랐습니다.

과거 구애라 여기고 넘어갔던 대부분의 행동이 상대에겐 추행이 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기사도 마감했으니 A씨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봐야겠습니다.

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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