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은 중국군 ‘인민해방군(People’s Liberation Army)’ 창설 91주년 기념일이다. 중국군은 1927년 8월 1일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 등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최초의 무장봉기가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에서 일어난 날을 창군기념일로 삼고 있다. 이들이 국민당 정부를 상대로 무장봉기를 일으킬 당시 군대 명칭은 ‘공농(工農)혁명군’이었다.

줄여서 ‘홍군(紅軍·Red Army)’이라고 불리던 중국군은 1947년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군이 대만 섬으로 옮겨갈 때까지 20년간에 걸친 내전에서 승리했다. 중국군은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베이징(北京) 천안문광장에서 “오늘 중화인민공화국 인민 정부가 성립됐다”고 외칠 때까지 중국공산당의 이른바 ‘혁명’ 주도세력이었다. 내전 과정에서 국민당군은 미국이 제공하는 자동기관총을 비롯한 우세한 무기 체제를 갖추고서도 홍군에 패했다. “승리하면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해주겠다”는 약속으로 당시 중국 인구의 80%가 넘는 농민들을 고무한 중국공산당의 전략이 먹힌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 역시 1966년에 출판한 세계적 명저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현대사회 형성에서 지주와 농민의 역할(Social Origins of Dictatorship and Democracy: Lord and Peasant in the Making of Modern World)’에서 중국공산당군의 국민당군에 대한 승리의 원인은 2300년 동안 소작농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던 중국 농민들에게 토지분배를 약속한 마오쩌둥의 전략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국민당군에 승리함으로써 중국 대륙에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1949년 이후 69년간 이어온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에서 지역적 분열을 저지하고 통일적인 국가를 유지하는 제1의 힘의 근원으로 작용했다. 1978년부터 덩샤오핑(鄧小平)이 이끈 개혁개방정책이 “중국을 분열로 이끌 것”이라는 외부의 수많은 관측에도 불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가적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버팀목 역시 인민해방군이었다.

그러던 인민해방군 내부에서 최근 ‘전역 후 대우 문제’를 놓고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 지난 6월 25일 중국 동부 장쑤(江蘇)성 전장(鎭江)시 시청 청사 앞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수만 명의 예비역 해방군들이 시위를 벌였다. 중국 군 당국은 2개 전차 사단과 수만 명의 진압군을 투입해서 시위를 해산시켰으나 최근까지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고 중국 내부 사정에 밝은 홍콩의 ‘아주주간(亞洲週刊)’과 미국의 반(反)중국 인터넷 미디어 ‘보쉰’, ‘미국의소리’ 등이 전했다. 중국 관영 미디어들의 보도가 통제된 가운데, 유튜브는 전장 시 시청 주위에 모여 ‘영웅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라, 피를 흘리게 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는 예비역들의 시위 장면과 진압 과정에서 부상당한 예비역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올려놓았다.

홍콩과 대만의 인터넷 미디어들은 ‘예비역들의 불만은 전역 후 취업 알선 과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데 대한 반발’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특히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진행된 ‘30만 감군(減軍)’에 대한 대책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전했다. 현재 전체 규모 5700만명으로 추산되는 예비역 해방군들 가운데 일부는 2016년 5월에도 베이징의 중국공산당 기율검사위원회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인 데 이어 그해 10월 11일에는 중국 국방부 건물을 에워싸고 시위를 벌였다고 전해진다. 이들 시위에 대해 시진핑(習近平)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도 군 지도자 회의를 소집해 강력 대처와 함께 예비역들의 불만해소를 전담할 기구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고 홍콩과 대만 미디어들은 전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겸 중앙군사위 주석이 지난 5월 16일 8차 중국공산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인민해방군 대의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겸 중앙군사위 주석이 지난 5월 16일 8차 중국공산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인민해방군 대의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그러나 올해 들어서도 시위는 계속되는 양상이다. 장쑤성뿐만 아니라 안후이(安徽)성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고 한다. 또 예비역들은 SNS를 통해 장쑤성의 시위 장소로 추가 시위대가 집결할 것을 호소하는가 하면, 시위 현장으로 물과 음료수, 먹을 것 등을 탁송하는 지지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고 반(反)중국 인터넷 매체들이 전했다. 이들 매체들은 시위 현장에서 촬영된 동영상도 첨부하고 있는데 실제 이를 보면 전국 10개 성에서 SNS 연락을 통해 모인 예비역들이 예비군복을 입고 모여드는 장면이 나온다. 시위 현장으로 장쑤성이 선택된 것은 장쑤성이 중국 대륙 동해안 중심부라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군에서 병력 동원 교육을 받은 예비역 장교들이 시위 현장으로 장쑤성 전장시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비역들의 시위로 이미 3명의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를 낸 가운데 시위 현장에는 더 큰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옹호 공산당’ ‘옹호 시진핑 주석’ 등의 구호를 적은 플래카드가 내걸리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중국 인터넷 매체들은 예비역들의 장쑤성 시위가 여러 측면에서 1989년 베이징 천안문광장 시위를 중국 인민들에게 떠올리게 한다고 지적한다. 현재 시위 가담자들 가운데에는 1979년 베트남과의 국경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역한 장교와 병사들도 포함돼 있는데, 이들 예비역들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겸 중앙군사위 주석이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 나와 발언한 “영웅들에게 피나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라(不能讓英雄流血又流淚)”는 말을 시위 현장 구호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내 많은 지식인들은 “시진핑 중앙군사위 주석이 이끄는 인민해방군이 최근 항공모함 2척 건조, 남중국해에 대한 군사기지화 사업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무기 체제 발전에는 많은 예산을 쓰는 반면, 군의 인적 자원에 대한 생활 개선과 예비역 군인들에 대한 전업 프로그램이 부실화되고 있는 것이 장쑤성 시위의 가장 큰 이유”라고 지적하고 있다. 인민해방군은 1989년 천안문사건 이후 “인민들을 공격한 인민해방군”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이미지가 크게 손상됐다. 중국 지식인들은 이번 장쑤성 시위가 인민해방군이 더 이상 ‘인민을 해방시키는 혁명 전위대’가 아니라 먹고살아가야 할 구체적 직업인들로 변해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박승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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