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가설’이란 것이 있습니다. 포유류와 영장류 중에서도 유독 인간만이 폐경을 하는 신비한 현상에 대한 몇 가지 가설 중 하나입니다.(범고래 등 몇 종류의 고래도 인간처럼 폐경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이 가설에 따르면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는 것보다는 손주를 돌보는 것이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유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늦은 나이에 위험한 출산을 하기보다 손주의 생존율을 높이는 데 기여하면서 자신의 생존율도 높여왔다는 얘기죠. 이 가설을 처음 내놓은 미국의 크리스텐 호크스 박사는 인간은 6만~2만4000년 전 어느 시점부터 나이 든 여자가 아이를 낳지 않고 손주를 돌보기 시작했는데 이 이후 수명이 급격히 늘었다고 주장합니다. 폐경을 안 하는 침팬지가 성인이 된 후 25년 정도 더 사는 반면 인간은 성인이 된 후 49년을 더 살게 됐다는 거지요. 할머니들이 장수 유전자를 퍼뜨린 덕분에 다른 영장류보다 수명이 늘어난 것입니다.

이 가설이 지금은 맞을까요. 최근 저녁자리에서 ‘웃픈’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노부부가 딸만 둘을 뒀는데 두 딸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딸들이 걸핏하면 아이들을 봐달라며 들쳐업고 오는 통에 딸이 들이닥칠 기미가 보이면 아파트 불을 꺼놓고 쥐 죽은 듯 지낸다는 얘기였습니다. 지금의 할머니들한테서는 진화학자들이 말하는 손주 보는 DNA가 사라지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인생을 더 즐기고 싶어하는 욕구가 손주 보는 DNA를 지우는 것이 어찌 보면 세상의 변화에 따른 진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없어 보이는 얘기를 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폭염 때문인 것 같습니다. 폭염과 에어컨 바람에 시달리다 머리가 띵해져서인지 진화에 대해 이리저리 두서없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끔찍한 더위가 매년 더 심해지면 인간이 더위를 이길 수 있도록 진화할까요. 복사열을 피하느라 기린처럼 키가 커지고, 땀구멍이 두세 배 늘어날지 모르죠. 실없는 얘기를 자꾸 하는 걸 보니 더위를 먹긴 먹었나 봅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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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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