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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2호] 201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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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을 하며]민낯

정장열  편집장 

이 글을 쓰는 지금, 제 책상 옆 TV에선 태풍 솔릭이 제주를 훑고 내륙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생방송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호를 마감하고 밤에 사무실을 나서면 거센 바람과 마주할 듯합니다.
   
   사람은 평생 잘 잊히지 않는 몇 가지 장면들을 머릿속에 담고 삽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는 과거 어느 시점 흑백의 장면들 말입니다. 태풍이라는 단어는 저한테도 그런 장면 하나를 뇌리에서 불러냅니다.
   
   어린 시절, 주변에 논이 있던 서울 변두리 동네에 살 때의 일입니다. 그 동네에는 제 또래의 한 혼혈아이가 있었습니다. 산꼭대기 움막 같은 집에 살던 그 친구는 동네 아이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괜한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방해하다가 자기 집으로 도망가곤 했습니다. 동네 아이들도 자신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긴 그 친구를 놀리는 걸 놀이로 삼았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아마 ‘왕따’나 ‘이지메’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절대 물러서지 않고 외로운 늑대처럼 싸웠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것을 멀찍이 떨어져 노려보던 그 친구의 날 선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모질고 독하게만 보이던 그 친구가 뜻밖에 눈물을 흘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금과 같은 태풍이 몰아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른들의 금족령 때문에 다들 집 창문에 붙어서 밖만 쳐다보다가 거짓말 같은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귀청을 찢는 듯한 바람 속에 그 친구가 살던 집의 지붕이 훌렁 날아가버린 겁니다. 공중을 떠다니는 지붕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이었습니다.
   
   바람이 좀 잦아들자 아이들은 앞다퉈 그 집으로 달려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한눈에 드러났습니다. 비루한 가재도구, 낡은 이불을 둘둘 말고 물기 머금은 거친 바람 속에 누워 있던 할머니. 그 옆에서 친구의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어머니 옆에 바싹 붙어선 그 친구는 엉엉 소리를 내어 울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보자 울음소리만 더 커졌지 평소의 독기 어린 표정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그냥 슬픈 아이였습니다. 태풍이 그 친구의 마지막 자존심을 날려버린 듯했습니다.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고 벽이 무너져내리면서 그 아이를 가려줄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아 보였습니다. 평소 그 아이를 놀림감으로 삼던 우리도 말 없이 산을 내려왔습니다. 저마다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말입니다.
   
   40여년 전 빛바랜 기억을 끄집어낸 것은 아마 솔릭일 겁니다. 하지만 솔릭만으로는 그 기억을 또다시 불러낸 이유가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진짜 이유는 기억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민낯의 순간’일지 모릅니다. 서로 모든 것을 벗고 민낯으로 마주하는 순간 말입니다. 저에게는 그 기억이 아마 평생 첫 번째 ‘민낯의 순간’이었을 겁니다. 그 이후 세상을 보는 눈을 조금씩 키워가는 과정에서 선입견과 편견의 시선을 가능한 버리고자 노력한 것은 그 기억 덕분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번호 커버스토리는 박혁진 기자가 쓴 북한산 석탄 관련 의혹입니다. 이 불투명하고 석연치 않은 스토리에서 진실을 파내느라 박 기자가 꽤 발품을 팔았습니다. 취재를 하면 할수록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솔릭이 이 스토리를 뒤덮고 있는 검은 가루들을 다 날려버려 여기도 민낯이 좀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이 지면에 담는 글이 평소보다 길어졌네요.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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