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의 여름은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장례식과 함께 끝났고, 가을은 밥 우드워드의 새 책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로 시작됐다.

늦은 여름 휴가를 가 있는 동안 매케인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독불장군’이란 별명으로 유명하지만, 전쟁영웅이자 소신을 굽히지 않는 정치인으로 초당적 인기와 존경을 받았던 매케인의 죽음은 워싱턴을 슬픔에 빠뜨렸다. 미국의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매케인에 대해선 각별한 기억을 갖고 있다. 2000년 대선 때 공화당 경선 초반 두각을 나타냈던 매케인의 유세현장에 가본 일이 있다. 대학원 수업의 현장학습이었다.

뉴햄프셔주의 꽁꽁 언 겨울 광장에 신나는 음악이 울려퍼졌다. 춤추듯 몸을 흔들고 있던 지지자들 사이로 매케인이 나타났다. 그의 연설은 박력 있고 강렬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연설 내용을 자세히 모르는데도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그날 유세장엔 어쩌다 그 자리에 있게 된 외국인의 마음까지 끌어당기는 열정 같은 게 있었다. 덕분에 그날 이후 미국 대선에 오래도록 관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당시 매케인 열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결국 경선을 중도 포기했다.

조지 W 부시에게 참패해 경선을 포기하던 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기처럼 쿨쿨 잤다. 그렇게 두 시간을 자다 일어나 엉엉 울고, 다시 잠들었다가 두 시간쯤 지나면 또 일어나서 펑펑 울었다.” 매케인은 워낙 직설 화법을 구사하기로 유명하지만 이런 표현을 보고 무섭도록 솔직하다고 생각했다. 2008년 그는 다시 도전해 마침내 공화당 대선후보가 됐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에게 패해 결국 미국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다.

지난해 처음으로 매케인 의원을 인터뷰하면서 거의 20년 전 기억을 얘기했더니 그는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이라며 웃었다. 상원의 원로 정치인이 된 매케인은 부드럽고 조용했다. 매케인이라고 해서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입장이 애매해 공격을 받기도 하고, 한때는 스캔들에 연루돼 고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베트남전에서 포로가 돼 모진 고문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전쟁영웅의 면모는 울림이 컸다.

워싱턴의 가을은 9월 초 노동절 휴가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터뜨려 결국 닉슨을 물러나게 했던 전설적인 기자 밥 우드워드가 기다렸다는 듯 새 책을 내놨다. 이 책은 이미 몇 달 전 출판이 예고돼서 나도 온라인 서점에 예약구매를 해놨다. 그런데 내용은 책을 안 보고도 짐작이 가능하다. 트럼프의 백악관이 얼마나 어수선하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일 것이다. 최근 보도된 책 내용은 딱 그대로였다. 돌아서서 대통령을 욕하는 참모들, 참모들을 무시하고 막말하는 대통령, 그리고 그들이 꾸려가는 온갖 정책과 백악관 안팎의 혼란에 대한 온갖 에피소드가 쏟아졌다. 트럼프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트위터를 통해 당장 반박에 나섰다.

트럼프는 ‘대통령다운가?’라는 기존의 잣대를 들이대면 답이 안 나오는 대통령이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워싱턴에선 늘 트럼프 개인의 자질을 문제 삼지만 더 큰 문제는 그가 미국의 선택이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미국을 이해하려면 트럼프보다는 트럼프를 선택한 미국의 변화를 들여다봐야 한다.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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