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치는 사실을 외면하고 명분의 포로가 된 지 오래다. 더구나 문제는 그 명분이 각 정파의 독단이라는 점이다. 이로 인해 정치문화는 피폐하고 살벌하기만 하다. 이런 문화의 뿌리를 더듬어가다 보면,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3000번 이상 언급된 거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다. 역사상 그만큼 논쟁적인 인물도 드물다.

그는 학문과 정치가 완전히 하나로 결합된 조선 후기를 상징하는 학자이자 정치가다. 그의 영향력은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이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수백 년 동안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 자체가 금기시되었다. 그런 상태가 현대에까지 이어지다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평가가 등장했다. 바로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2000년)다.

송시열의 부친은 충직한 서인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서인의 종주(宗主)인 율곡을 통해 주자로 나아가라고 당부했다. 그런데 율곡과 동시대에 송익필이라는 예학(禮學)의 대가가 있었다. 그의 예학은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에게 이어졌고, 그들 부자가 송시열의 스승이었다. 그리하여 송시열은 서인이되, 율곡의 학문보다 김장생의 학문, 즉 예학을 이어받았다.

임진왜란으로 초토화된 조선은 새로운 국가적 활로를 모색해야 했다. 이때 발발한 인조반정은 조선 후기의 성격을 결정 짓는 대사건이었다.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치며 나름대로 신망을 받던 군주였다. 따라서 서인세력의 쿠데타는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남인세력을 관제야당으로 끌어들여 부정적 민심을 무마하려고 했다.

무엇보다 서인정권은 명나라에 대한 광해군의 배신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숭명반청(崇明反淸)을 제창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네 글자는 조선 후기를 관통하는 절대 이데올로기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냉엄한 현실을 외면하고 공허한 명분에 매달린 탓에 병자호란을 자초했다. 그때 송시열은 막 조정에 진출한 신참 관리로서 남한산성에서 그 전쟁을 경험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소현세자는 볼모를 자청했다. 그는 20대 중반부터 9년간 볼모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국제 현실에 눈을 떴다. 그는 세상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며 중국과 서양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각성은 시대착오적인 인조와 서인세력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급서하고 말았다. 독살설이 유력하다.

종법(宗法)에 따르면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는 며느리마저 죽이고 손자들을 유배 보냈다. 그리고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나중에 그가 즉위하니 효종이었다. 효종은 강력한 북벌(北伐)정책을 추진했다. 그것이 자신의 꿈이고, 또한 가족적 비극을 통해 왕위에 오른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길이기도 했다.

이때 송시열은 서서히 서인의 거두로 성장했다. 조선은 유학자의 나라였다. 효종도 그의 도움 없이는 북벌이 불가능함을 알았다. 효종이 그에게 전권을 주다시피하며 북벌을 독려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늘 원론에 머물렀다. “양민에 힘쓰고 왕도를 펼치면 기회가 올 것입니다.” 군사적 북벌론자인 효종과 사대주의적 명분론자인 송시열은 도무지 접점이 없었다.

그러다 효종이 갑자기 서거했다. 그때 인조의 계비, 즉 효종의 계모가 살아 있었다. 그녀의 복상(服喪) 기간을 두고 조정이 대소동에 휘말렸다. 이것이 제1차 예송(禮訟)사건이었다. 장례 후에도 이 문제는 계속해서 최대의 정국현안으로 꿈틀거렸다. 15년 후에 효종의 비가 죽었을 때 똑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것이 제2차 예송사건이었다.

당시 엘리트들은 거의 20년 동안 예송에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 논란의 핵심은 효종을 장자로 보느냐 차자로 보느냐였다. 송시열은 왕가든 사가든 원칙은 똑같다는 입장이었다. 반대파는 왕가에서 왕통을 이으면 장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문제는 왕통의 정통성에 관계되는 예민한 문제였다. 그럼에도 현종은 송시열의 기세에 눌려 속수무책이었다.

현종의 뒤를 이어 숙종이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그러나 숙종은 단호하고 주관이 뚜렷했다. 그는 즉위한 지 4개월 만에 눈엣가시 같은 송시열에게 귀양을 명했다. 이때 송시열은 이미 67세였다. 아울러 숙종은 주요 요직을 전격적으로 남인으로 교체했다. 인조반정 때 관제야당으로 영입된 남인이 50여년 만에 정권을 잡았다. 살벌한 정치보복이 일어났다.

더구나 숙종은 수시로 남인과 서인을 번갈아 등용하는 이른바 환국(換局)정치를 구사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정파 간 살육전을 이용하며 왕권강화를 도모했다. 이런 과정에서 정권은 다시 서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송시열은 5년 만에 더욱 커진 몸집으로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는 숙종을 만나서도 “요즘 무슨 공부를 하시느냐?”고 일갈했다.

다시 집권한 서인은 정국 대처 방식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했다. 이 대결에서 타협적인 방식으로 기득권을 추구한 노론이 승리했다. 송시열이 그 영수였다. 그런데 송시열이 왕자책봉을 문제 삼자, 숙종은 그를 귀양 보내고 노론세력을 축출했다. 다시 집권한 남인세력은 아예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결국 그는 이듬해 사사(賜死)되었다. 향년 83세였다.

그러나 훗날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잡고 그 권력은 조선 말까지 이어졌다. 결국 조선이 노론의 나라가 되었다. 당연히 집권세력에 의해 송시열은 우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명분을 중시하던 당쟁이 점점 정치공작으로 바뀌며, 당파 간의 대결은 피바람을 불렀다. 그로 인해 적대감과 원한이 쌓였다. 한쪽의 영웅은 다른 쪽의 원흉이 되었다. 송시열이 대표적이다.

주자학은 조선 전기에는 개혁사상이었다. 하지만 후기에 예학으로 흐르며 수구사상으로 변질되었다. 예학은 한마디로 각 신분에 따르는 분수와 예절을 지키라는 주장이다. 이를 둘러싼 학문적 논란이 곧 정치적 논란이었다. 심지어 왕가도 이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것이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예송사건을 촉발했다. 그들에게 민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미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의 국가적 정당성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나약한 문치국가로 전락한 조선은 역동적인 활로를 찾지 못했다. 여기에 인조반정이 결정적이었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시대착오적인 숭명반청을 외치며 수구적인 예학의 길을 터주었다. 그들은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기보다 예학적 이데올로기로 억눌렀다. 그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다.

조선은 극단적 이데올로기로 지배되는 비정상 국가가 되고 말았다. 엘리트들은 이를 통해 생존과 군림의 안전판을 확보했다. 그 위에서, 그들은 예학적 명분을 앞세워 정치공작을 벌였다. 거기에 민생과 백성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결국 조선은 ‘그들의’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인 이유다.

오늘날 정치문화도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예학의 그늘 속에서 자기중심적 명분에 사로잡혀 있다. 이쪽에게 선은 저쪽에겐 악이다. 거기에 민생과 국민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리하여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우리는 여전히 ‘아무개와 그들의 나라’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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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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