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구세군 냄비가 등장했다. 요즘은 기부액이 예전만 못한 듯하다. 아무리 소액이라도 자신의 돈을 흔쾌히 내놓기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물질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그만큼 끈질기다. 그러기에 모든 종교는 이런 집착을 죄악으로 간주한다. 예수도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16~17세기 무렵 오히려 부를 쌓아야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희한한(?) 사람들의 등장을 주장한 고전이 있다. 바로 막스 베버(1864~1920)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이다. 이 책은 1904년, 1905년 잇따라 발표한 두 편의 논문을 약간 수정하여 하나로 묶은 것이다.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에 대해 인상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무제한적으로 영리만 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자본주의 ‘정신’과는 더욱 그러하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이러한 비합리적인 충동의 억제, 또는 적어도 합리적 조절과 동일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자본주의는 오로지 근대 서구사회에만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것은 서구 중심주의라고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 사실성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합리적’ 자본주의는 가톨릭 지역보다 프로테스탄트 지역에서, 그중에서도 캘빈주의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했다. 베버는 이에 대해 ‘왜?’라는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왜?’를 풀어나가는 지적인 여정이다. 잘 알려진 대로, 프로테스탄티즘은 가톨릭에 비해 모든 방면에 걸쳐 개인의 생활양식을 극도로 부담스럽고 진지하게 통제한다. 사실 이런 특징은 외견상 자본주의와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가 않다.

우선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정신’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는 추상적으로 개념정의를 시도하는 대신 미국 사상가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의 ‘젊은 상인에게 주는 충고’(1848) 등을 인용, 분석한다. 그것은 시간, 돈, 근면, 신용 등을 활용해 자본을 증식시키라는 권고이다. 거기에는 자본증식을 개인의 의무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잘 드러나 있다. 당시 유럽의 점잖은 식자(識者)들은 이를 두고 ‘탐욕의 철학’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대가(大家)의 안목은 역시 비범했다. 베버는 이것이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처세술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근본적 에토스(ethos)라고 간파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직업(Beruf)을 의무나 소명으로 여기며 그 안에서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취하려는 태도가 바로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Beruf’(영어 calling)라는 개념에 깊이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루터가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는 ‘소명’과 ‘직업’이라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이를 통해 루터는 세속적 직업생활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실제로 이러한 생각을 현실생활에서 가장 심화시킨 것이 바로 캘빈주의였다.

16~17세기 무렵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곳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일부 등이었다. 이런 곳은 예외 없이 캘빈주의와 그 유파(流派)의 지역이었다. 캘빈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예정론’이다. 그것은 각 개인이 오로지 신의 은총을 사모하며, 태초로부터 확정된 운명을 따라 고독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존재라고 가르친다. 선택을 받은 기독교인은 자신에게 맡겨진 본분을 다해 이 세상에서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존재하는 도구일 뿐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비인간성’은 두 가지 방향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세상과 격리되어 오로지 신을 찬미하는 ‘수도원적 금욕주의’이다. 다른 하나는 현세적 행위에서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는 일이다. 캘빈주의는 후자의 길을 걸었다. 그들에게 모든 사회적 노동은 오로지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부단한 직업노동이야말로 구원의 확신을 위한 가장 탁월한 수단이었다. 그들은 직업생활이 신의 소명이며 거기에 신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믿었다. 이것은 직업노동을 통한 성실한 이윤추구를 합법화하여 부의 획득을 신의 축복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들은 재산이 커질수록 신의 영광을 위해 그 재산이 줄어들지 않도록 온전히 보전하고 나아가 부단한 노동을 통해 그것을 증식해야 했다. 그들은 성서에 나오는 ‘청지기’를 자처했다.

베버는 이러한 종교적 윤리를 ‘세속적 금욕주의’라고 불렀다. 이는 ‘수도원적 금욕주의’에 대응한 표현이다. 그 결과 그들은 근면한 노동, 금욕적 절제, 철저한 시간관리, 재산증식, 소명의식 등으로 무장하게 되었다. 이런 태도야말로 베버가 자본주의의 ‘정신’이라고 규정한 바로 그것이었다. 이때 그들이 사모하는 것은 구원이지 결코 재화 자체가 아니었다. 재화에 대한 근심은 그들에게 ‘언제나 벗어던질 수 있는 얇은 외투’에 지나지 않았다.

근대 서구의 ‘합리적’ 자본주의는 이처럼 프로테스탄티즘의 독특한 윤리를 기반으로 발전했다. 그것이 바로 여타의 탐욕적인 의사(擬似) 자본주의와 차별적인 점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 얇은 외투를 점점 무거운 쇠우리(iron cage)로 바꾸어버렸다. 외적인 재화가 차츰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하자 정작 종교적 열정은 증발되고 재화에 대한 관심만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해 베버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상당히 우울하게 전망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전자가 후자를 어떻게 낳았는가를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베버는 이러한 현상이 당시의 특별한 조건에서 독특하게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두 변수가 ‘필연적’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독특한 결합 양상을 전문용어로는 ‘선택적 친화(selective affinity)’라고 한다. 이처럼 베버는 마르크스주의적 결정론을 배격하고 좀 더 열린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오늘날 그가 우려한 대로 무거운 쇠우리에 갇혀 ‘영혼 없는’ 재화의 포로가 되었다. 이럴 때야말로 초기 프로테스탄트들이 부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졌었는지 되돌아볼 만하다. 말할 나위도 없이 당시의 상황을 오늘날 기계적으로 재현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영혼 있는’ 부에 대한 그들의 탐색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근대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주인공은 종교적 열정으로 무장한 ‘청지기’였다. 청지기란 아무리 큰 부를 다뤄도 그것이 단지 자신에게 맡겨진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틈엔가 부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부자란 부를 오로지 자신의 몸에만 주렁주렁 매단 사람이다. 그런 거추장스러운 상태로는 어떠한 문도 통과하기 어려운 노릇이다.

성서에는 어느 부자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율법을 성실히 준수했다며 내심 칭찬을 기대한다. 하지만 예수는 그에게 가진 것을 모두 팔아 빈자들에게 나눠주라고 권면한다. ‘근심 어린’ 모습으로 돌아간 그는 성서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일화는 크든 작든 재물에 대한 태도가 곧 삶 전체에 대한 궁극적 태도라는 점을 일깨운다. 요즘 길에서 구세군 냄비를 마주칠 때마다 부자도 아니면서 ‘근심 어린’ 나를 문득 발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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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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