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바탕에 노란 줄로 장식된 김정은이 탄 특별열차가 베이징(北京)역에 도착한 것은 지난 1월 8일 오전 10시55분이었다. 중국 관영 신화(新華)통신은 이날 오전 7시2분쯤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 대변인은 1월 8일 당 총서기 시진핑(習近平)의 초청으로 조선노동당 위원장 겸 국무위원회 위원장 김정은이 1월 7일부터 10일까지 중국을 방문한다고 발표했다”는 한 줄짜리 뉴스를 전 세계 신화뉴스 단말기로 타전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된 노영민 전 주중 한국대사가 임지인 베이징을 출발해서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8일 오전 11시5분이었다.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을 출발한 항공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데는 2시간10분 정도 걸리므로, 노 전 대사가 탄 항공기는 오전 9시쯤 서우두공항을 이륙했을 것이고, 주중 한국 대사관저가 있는 베이징 차오양취(朝陽區) 싼위안차오(三元橋) 부근에서 서우두공항까지는 차가 막히지 않을 경우 30분 정도 거리이므로 노 전 대사는 오전 8시쯤 관저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노 전 대사는 김정은의 중국 방문 사실이 신화통신을 통해 보도된 뒤 1시간 후쯤 관저를 떠나 서우두공항으로 출발한 셈이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노 전 대사는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한 뒤 취재진과 만나 ‘북·중 정상회담 기간 중 주중 대사 부재 상황’과 관련해서 “원래 어제 저녁에 귀국하기로 티케팅을 했는데 오늘 온 것”이라며 “한국과 중국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 상시적으로 긴밀하게 소통하고 있다. 모든 것에 대해 이미 어젯밤, 오늘 아침 회의를 통해 마무리하고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사가 “원래 어제 저녁에 귀국하기로 티케팅을 했는데…”라고 말한 것은 그 시간까지는 김정은의 방중 사실을 모르고 있었거나,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랬다가 8일 오전 7시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가 신화통신을 통해 김정은의 방중 사실을 발표하자 ‘김정은의 방중 사실은 확인됐으니, 나머지는 정무공사에게 맡기고 청와대 비서실장 임명장을 받으러 출발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티케팅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과 시진핑 사이의 북·중 정상회담은 노 전 대사가 김포공항에 도착한 뒤 5시간30분쯤이 흐른 후 베이징 중심부의 인민대회당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화통신과 중국중앙TV를 비롯한 중국 관영 미디어들은 북·중 정상회담을 9일 밤까지도 보도하지 않았다. 중국 외교부 웹사이트에도 발표되지 않았다. 8일 오후에 진행된 북·중 정상회담 내용은 10일 오전 7시가 되어서야 신화통신을 통해 발표됐다. 이미 노영민 전 대사의 신분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바뀌어 있을 때였다.

물론 국제정치나 중국 문제 전문가가 아닌 노영민 전 대사가 대통령 비서실장 임명장을 받으러 오는 날짜를 늦추고 베이징에서 김정은 방중 관련 정보수집 업무를 총지휘했어도 결과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2017년 10월 주중 한국대사로 부임해서 기껏해야 1년3개월간 대사직을 수행한 점을 감안하면 복잡미묘한 북·중 관계의 깊은 부분을 이해하기는 물론 중국어와 영어, 외교 실무의 기초를 이해하기에도 부족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전문 외교관이 아닌 대통령의 측근이 주중 한국대사로 부임한 것은 노영민 전 대사가 처음이 아니다. 가까운 예로, 전임 박근혜 대통령은 군인 출신을 보내기도 했고, 그 이전 김영삼 대통령도 측근 정치인을 주중 한국대사로 파견했었다. 그나마 두 경우는 강변할 거리라도 있다. 군인 출신은 안보 문제와 관련된 전문가라 할 수 있다. 또 김영삼 대통령이 파견한 정치인은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한·중·일 산업화와 유교 비교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중국 전문가로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다. 특히 이 대사는 베이징에 부임한 후 중국어를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한국 특파원들에게 밝힌 뒤 실제 중국어 사전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기 시작해서 사전 한 권을 완독하기도 했다. 사전 완독 기념 점심을 한국 특파원들과 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 전문가를 자처하던 이 대사도 재임 시 실수를 했다.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앞두고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청와대로부터 “당 총서기가 정치적으로 센 인물이냐, 총리가 센 인물이냐”는 질문을 받고 그만 “총리가 센 사람이다”라고 잘못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해서 당 총서기와 회담을 하면서는 중국 측이 마련해준 시간을 다 쓰지 않고 회담 석상을 뜨는 일이 벌어졌다. 반면 총리와는 예정된 시간을 넘겨 회담을 연장하는 바람에 중국 총리실 관계자들이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미숙한 중국 외교가 낳은 엽기적인 사건은 시진핑 현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국가부주석이던 시절 발생했다. 시진핑 당시 국가부주석이 서울을 방문했는데도 청와대는 “대통령이 국가부주석을 접대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어이없는 명분을 내세워 회동을 거절했다. 당시 시진핑 부주석은 평양을 먼저 방문해 김정일 당시 노동당 국방위원장이 주도하는 엄청난 환대를 받은 후 서울을 방문한 길이었다. 당시 청와대의 판단은 부주석이나 부부장 등은 중국의 한 부서에도 네댓 명씩 있으니 국가부주석도 네댓 명쯤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중국 권력구조에서 국가부주석은 단 한 명밖에 없다. 더욱이 시진핑 부주석은 그 무렵 다음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으로 이미 내정돼 있던 상태였다.

노영민 전 대사도 미숙한 외교 실력을 노출한 적이 있다. 지난해 10월 11일 노 전 대사는 베이징 대사관저에서 개천절과 국군의 날을 기념하는 연회를 개최했다. 이 리셉션에 중국 측에서는 쿵쉬안유(孔鉉佑) 외교부 부부장(차관)을 파견했다. 이보다 한 달 앞선 9월 6일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에서는 북한 정권 수립 기념 리셉션이 개최됐는데 이 자리에는 중국 권력서열 4위인 왕양(汪洋) 정치국 상무위원 겸 부총리가 왔다.

중국에 대한 우리 외교가 이처럼 ‘레벨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정부와 대통령의 잘못 때문이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진 뒤 27년간 국제정치와 중국 문제에 어두운 우리의 대통령들은 대사와 총영사 선정 과정에서 중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인과 교민들이 보기에 우스운 결정을 내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노영민 전 대사는 김정은의 3차 방중 때도 베이징을 비우고 한국으로 휴가를 와서 개인적인 집안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줘 베이징 한국 교민들의 비웃음을 샀다.

제대로 된 대사를 원하는 한국 교민들은 “레벨 낮은 대사는 대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의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외교적 실수를 한 대사를 불러들여 대통령 비서실장 임명장을 주고, 그렇게 임명된 대사는 청와대 직원들을 향해 ‘춘풍추상(春風秋霜·남에겐 관대하고 자신에겐 엄격하라)’이라는 대통령의 좌우명을 들려주었다니, 1급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박승준 아시아리스크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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