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먹방’, 저기도 ‘먹방’이다. 먹방은 우리 발음 그대로 ‘mukbang’으로 영어 신조어 사전에도 올랐다. 이것은 먹방이 그만큼 우리나라에 고유한 현상이라는 뜻이다. 먹방은 단순한 오락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 특히 식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점심 번호표를 받기 위해 깜깜한 새벽부터 대박집으로 달려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처럼 먹방의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탐식(貪食)일 것이다. 탐식은 대체로 과식과 비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다소 ‘통통한’ 연예인들이 먹방에서 맹활약 중이다. 사회적으로도 최근에 비만이 부쩍 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과식이나 비만은 주로 ‘의지’의 문제로 논의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의지만을 문제 삼는 방법으로는 사정이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는 전혀 ‘새로운’ 대응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흥미진진한 책이 있다. 바로 데이비드 케슬러 박사의 ‘과식의 종말’(The End of Overeating·2009)이다. 저자는 미국 FDA 국장을 지낸 의료 전문가다. 그는 과식과 비만을 한마디로 ‘조건반사 과잉섭취’라는 ‘생물학적’ 증상으로 진단한다. 처방도 당연히 그런 진단에 근거해 제시된다.

“많은 사람들이 치료가 필요한 정도의 섭식장애 증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늘 음식 생각을 하면서 산다. 그리고 일단 먹기 시작하면 멈추지를 못한다. 포만감을 느끼고 한참이 지나서도 여전히 먹는다.… 그리고는 후회를 한다.” 그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들이 어떻게 음식 섭취를 조절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몸무게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미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비만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평균 몸무게도 늘었지만 특히 비만이 더욱 비만화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무엇보다 1970~1980년대에 이르러 식품산업이 발전하고 외식이 일반화되었다. 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졌다.

이런 ‘새로운’ 환경에 대해 아주 심각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실험이 하나 있다. 한쪽의 쥐들은 맘껏 먹게 하고, 다른 쪽의 쥐들은 먹이를 제한했다. 그리고 두 그룹에 평범한 ‘보통’ 먹이를 제공했다. 당연히 배고픈 쥐들이 배부른 쥐들보다 더 빨리 먹이를 향해 달려갔다. 다음에는 설탕과 지방이 듬뿍 들어 있고 초콜릿향이 가미된 고소한 ‘특별’ 먹이를 제공했다. 그러자 배고프든 배부르든 관계없이 모든 쥐들이 똑같은 속도로 먹이를 향해 달려갔다.

자연상태에서 동물은 일정량을 먹고 나면 일반적으로 만족하고 더는 먹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한때 배고프지 않은 상황에서는 음식이 효과적인 보상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위의 실험을 통해 그런 생각이 ‘낡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실험은 강렬한 인공적 맛이 본래의 보상체계를 교란시킨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미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맛을 잃어버렸다. 그 대신에 설탕, 소금, 지방을 다양한 방식으로 혼합한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져 있다. 이런 인공적인 감칠맛에 입각하여 새롭게 구축된 보상체계는 허기나 포만과는 관계없이 오로지 보상 자극 자체만을 위해 작동한다. 한마디로 인공적 맛이 우리 뇌의 회로를 바꾼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 식품업계와 외식업계의 영향이 크다. 그들은 설탕, 소금, 지방을 적절히 혼합하여 되도록 자극적 맛과 색다른 식감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 또한 재료는 잘게 부수고 부드럽게 가공하여 먹기도 쉽고 포만감도 덜 느끼게 만든다. 무엇이든 1인분은 대체로 한 끼 칼로리를 훨씬 초과한다. 또한 첨단 광고기법을 활용해 음식에 화려한 감각적 가치와 단서를 부여한다. 음식은 도처에 있고 언제 어디서나 먹는 것이 용인된다.

이런 환경에서 먹는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는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어떤 단서에 노출되면 반사적으로 음식을 찾는다. 더구나 발달된 식품산업 덕분에 우리는 손쉽게 음식을 구해 곧바로 섭취할 수 있다. 어느 틈엔가 우리 몸 안에 ‘자극-반응-습관’이라는 통제불능의 사이클이 만들어지고 만다.

이런 현상은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의 실험에 따르면, 종소리를 들으며 음식을 먹는 데 익숙해진 개는 나중에 종소리만 들어도 침을 흘린다. 실험실의 개는 침만 흘리지만 우리는 침이 고이면 곧바로 음식을 구해 욕망을 풀 수 있다. 저자는 이로 인한 오늘날의 과식 현상을 ‘조건반사 과잉섭취’라는 생물학적 증상으로 진단한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을 반복하면 그 인지 기억이 점점 명확하고 지배적인 기억이 된다. 이렇게 해서 갈망, 만족감, 그리고 더 큰 갈망의 사이클이 만들어진다. 이것이 조건반사 과잉섭취가 자체적인 동력을 갖게 되는 과정이다. 이때 뭔가를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결국에는 그것을 더 먹게 된다. 욕망은 억누를수록 더욱 강렬해진다. 우리는 과식이 ‘의지’로 해결되기 어렵다는 점을 경험적으로 잘 안다.

과식이 ‘조건반사 과잉섭취’라는 생물학적 증상이라면 해법도 그에 근거해야 한다. 음식에 관한 다양한 단서들은 한마디로 ‘뇌에 보내는 초대장’이다. 그 초대에 응하는 행동이 반복되어 습관이 형성된다. 따라서 치료의 토대는 “단서가 뇌에 보내는 초대를 거절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런 노력을 통해 차츰 조건반사의 사이클을 끊어나가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규칙’을 세우는 것이다. 규칙이란 유혹적인 자극이나 단서를 만날 경우에 대비하여 ‘미리 정해 놓는’ 대응행동이다. 예를 들어, 자주 들르던 가게를 우회하는 따위다. 이런 규칙은 우리로 하여금 평소 하던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자꾸 숙고하게 만든다. 우리가 조건반사에 갇혀 있을 때에는 뇌의 극히 일부만 쓴다. 하지만 규칙을 세워 실천하면 저절로 뇌의 좀 더 많은 부분, 좀 더 의지적인 부분을 활용하게 된다.

‘과식의 종말’은 우리가 오늘날 얼마나 과식을 하기 쉬운 조건 속에 살고 있는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실제로 비만이 아닌 사람들조차 상당수가 ‘조건반사 과잉섭취’에 시달리고 있다. 이제 과식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맡겨두기 어려울 정도다. 따라서 국가, 사회, 식품업계가 나서서 사회적인 기구와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식품 마케팅이 좀 더 엄격한 감시와 비판 아래 놓여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최근에 우리나라도 먹는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달고 짜고 고소한 맛 이외에 매운맛까지 가지고 있다. 현란한 식품 광고도 모자라 ‘먹방’ 광풍까지 무차별적으로 몰아치고 있다. 요식업자, 요리사, ‘통통한’ 연예인이 이 시대의 최고 엔터테이너다. 거기에 배달 서비스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오늘날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음식을 생각하며 산다. 아마 우리만큼 ‘과식의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한 사회도 없을 것이다.

1980년대 미국에서 비만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그것이 머지않아 우리의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개인의 현명한 대처는 물론 사회적 대비도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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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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