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폄훼 망언으로 물의를 빚은 자유한국당 김진태·김순례·이종명 의원 징계 여부를 논의하는 당 윤리위원회가 비공개로 열린 지난 2월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으로 김진태 의원을 비호하는 ‘태극기 부대’ 회원들이 진입, 김 의원 등에 대한 윤리위 제소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5·18 폄훼 망언으로 물의를 빚은 자유한국당 김진태·김순례·이종명 의원 징계 여부를 논의하는 당 윤리위원회가 비공개로 열린 지난 2월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으로 김진태 의원을 비호하는 ‘태극기 부대’ 회원들이 진입, 김 의원 등에 대한 윤리위 제소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보수의 한자 풀이는 지킬 보(保), 지킬 수(守), 지키고 또 지키는 것이다. 무엇을 그토록 지켜야 하는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법치주의라는 민주공화국의 3대 가치다. “보수 세력은 있으나, 보수 철학은 없다.” 한국의 보수를 논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철학의 빈곤은 권세만 좇을 뿐, 가치에 대한 탐구는 등한시한 지적 게으름의 소산이다. 그런데 시야를 넓혀 역사의 흐름을 관찰해 보면, 한국의 보수가 왜 철학적으로 빈곤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법치주의라는 대한민국의 체제가치는 엄밀히 말해 자생적 산물이 아닌 외부로부터 이식된 것이다. 구한말 개화파와 독립협회의 근대국민국가 건설을 위한 선구적 노력이 역량 부족으로 좌절된 후 망국과 광복, 분단의 질곡 속에서 대한민국은 외부의 힘을 빌려 탄생했다. 1948년 7월 17일에 제정된 건국 헌법은 정치 분야에서는 미국과 프랑스의 헌법을, 경제 분야에서는 서독의 헌법을 주로 참조하여 만들어졌다. 내재적(內在的) 발전과 숙성의 결과물이 아닌 외래적(外來的) 산물이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둘씩 쟁취한 것이 아니라 일거에 도입된 것이었기에 국정을 담당한 보수 세력의 체제가치에 대한 이해와 체화의 수준은 낮았다. 한국 보수의 태생적 한계였던 것이다. 이는 이후 제도 운영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장기집권 개헌은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흑(黑)역사를 썼다. 시장경제 역시 국가자본주의적 모습을 띠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와 빈곤의 위협이라는 시대 상황을 감안했을 때, 이승만의 건국과 박정희의 산업화는 빛나는 성취였다. 그래서 공칠과삼(功七過三)인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흔히 전두환의 쿠데타를 박정희의 그것과 동렬선상에서 취급하는데 중대한 차이가 있다. 5·16군사정변은 집권 과정에서 인명살상이 없었던 반면, 5공의 출범 과정에서는 유혈이 낭자하였다. 외적의 침입에 맞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국군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의 양민을 학살하는 반(反)헌법적 내란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전두환 일당의 만행은 보수의 이름으로도 단죄되어야 마땅했다. 김영삼 정부의 5·18특별법 제정과 시행이 바로 그것이었다.

박근혜의 국정운영 역시 보수 가치로부터의 일탈이었다. 법에 따른 권한 행사라는 공화국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고 아무런 자격이 없는 최순실의 국정 개입과 농단을 허용하였고, 심지어 권한을 남용하여 최순실의 사익 추구를 방조하였다.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사기업의 인사와 계약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기업경영의 자유와 재산권을 침해하였다. 사적 자치 영역에 대한 부당한 간섭은 자유주의의 적이다. 보수 세력의 지원을 받아 당선된 박근혜는 보수 가치를 파괴하였다.

보수는 단순히 옛것을 고집하는 수구와 달리 지키기 위한 개혁에 나선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를 시대의 흐름에 맞게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일신(日新), 우일신(又日新)한다. 태생적 한계와 초기 과정의 시행착오로 발생한 한국 보수의 크고 작은 흠결과 과오는 이후 과정에서의 치열한 노력으로 치유, 보정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전두환과 박근혜는 역방향으로 질주했다. 그들의 집권 기간은 보수의 시간이 아니라 보수 퇴행의 시간이었다.

2019년 2월, 보수정당인 자유한국당은 전두환과 박근혜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박근혜의 옥중 메시지는 ‘기승전(起承轉)박(朴)’의 도돌이표를 만들어냈고, 일부 의원들의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망언은 극우파쇼 시대의 흑백필름을 재생시키고 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음을 되새겨야 하는데, 대법원에서 내란 목적의 살상이라고 결론이 난 흑역사의 명예회복을 획책하고 있다. 탄핵을 거치면서 아픈 만큼 성숙해질 것이라 자위했건만, 아프니까 망가지고 있다.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는 “우둔한 자는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현명한 자는 역사로부터 배운다”고 했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사람은 어리석다. 반면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 역사로부터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현명하다. 역사 학습의 묘미는 바로 선인(先人)들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는 것에 있다. 불행하게도 작금의 자유한국당은 우둔한 자의 축에도 끼지 못한다.

상당수 보수인사들은 문재인 정부의 실정(失政)이 언젠가 자신들에게 권력을 다시 안겨다줄 것이라는 달콤한 계산에 빠져 있다. 보기 민망할 정도다. 그런데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다. 문재인 정부의 크고 작은 실수와 실책으로 반사이득이 발생하겠지만, 그것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정권 교체까지 담아낼 보수정치의 그릇이 깨져 있다는 사실이다. 혁신 없는 반사이득은 오히려 혁신을 지체시켜 정권 교체를 멀어지게 할 뿐이다. 민주당의 전략가들은 지금 웃고 있다.

무엇이 엘리트 집단인 자유한국당을 정치바보로 전락시켰는가. 한마디로 ‘막대기’의 위력이다. “영남에서 공천만 받으면 막대기를 꽂아놓아도 당선된다”는 그 막대기 말이다. 여의도 배지들은 자당의 정권 획득보다 자신의 재선을 우선시한다. 해서 영남의 ‘막대기파 배지’들은 공천을 보장해줄 동아줄 잡기에 혈안이 된다. 박근혜발(發) 진박 소동도 이 때문에 일어났다. 안타깝게도 ‘막대기 공천’에 대한 영남 유권자들의 반발은 그다지 크지 않다. “저기 보수가 있으니 찍는다”는 관성적 투표 행태가 여전히 지배적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행위를 반동(反動)이라고 한다. 지금 자유한국당 내에는 반동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다.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는 “과거는 서막이다(The past is prologue)”라고 했는데, 자유한국당에서는 과거가 서막을 넘어 본편이 되고 있다. 막대기파 배지들의 소리(小利)에 눌려 체제가치 수호라는 대의(大義)가 희생되고 있다.

2018년 5월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은 폭망하였다. 문제는 이것이 과연 바닥인가 하는 점이다. 반등은 바닥 확인을 반드시 거친다. 자유한국당은 아직도 113개의 배지를 갖고 있다. 망했다고는 해도 엄청난 숫자다. 내년 총선은 진짜 바닥이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 바닥의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는 공포다.

보수는 익숙함이란 단어와 매우 친화적이다. 전통과 관행을 중시하는 보수는 결과가 불확실한 모험보다 기존의 익숙함을 선호한다. 그러나 한국 보수는 이제 익숙했던 많은 것들과 결별해야 한다. 그것은 생존과 거듭남을 위함이다. 익숙한 사고방식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이탈하여 진지한 성찰과 기존의 것들에 대한 사려 깊은 재해석을 반복적으로 수행하여야 한다.

입춘이 지났건만 보수의 봄날은 아득히 먼 곳에 있다. 지금은 보수의 겨울이 아니라 빙하기다. 2월 27일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의 결과에 따라 보수의 빙하기는 더욱 길어질 수 있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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