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국은 조선과 미국이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일관되게 지지해왔다. 우리는 조선과 미국 간의 제2차 정상회담이 순리대로 진행되어 적극적인 성과를 거두어, 조선반도의 비핵화와 지구적인 평화 실현에 공헌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2월8일 김정은과의 두 번째 정상회담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될 것이라고 발표하자, 사흘 뒤인 11일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발표한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변함없는 중국의 입장”이다. 2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이 핵무기를 포기할 경우 북한 역사에 전례가 없는 경제적 번영을 하게 될 것이라고 무지갯빛 전망을 내놓고 있다. 결국 “조선이 제2의 베트남이 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중국에서도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한(漢) 무제(武帝)가 기원전 111년 베트남을 정복해서 938년까지 1000년이 넘는 기간 지배를 당한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후 베트남은 중국에 만만하게 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 939년 응(Ngo·吳) 왕조가 중국의 지배에서 독립한 이래 송·원·명·청 왕조의 네 차례 침공을 좌절시켰다. 가까이는 197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지시로 “엉덩이를 때려(打屁股) 가르침을 주기 위해” 25만의 인민해방군 병력을 동원해서 침공했으나 참담한 패배를 안겨줬다. 그런 베트남을 김정은이 공식 방문하고, 더구나 수도 하노이에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갖는데 중국 지도부의 속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그러나 중국의 베트남 전문가들과, 북한과 베트남 문제에 밝은 블로거들은 “겉으로 보기에 조선과 베트남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다르다. 결코 조선이 제2의 베트남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견해를 활발하게 인터넷 공간에 올리고 있다. 우선 북한과 베트남은 다 같이 내전을 경험했지만 두 나라가 처한 국제정치적 상황이 서로 다르며,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와 베트남이 중국과 맺어온 관계의 컨텍스트가 서로 달라 김정은이 한 번 베트남을 방문한다고 해서 북한이 제2의 베트남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닉네임이 ‘퍄오잉랑즈(飄英浪子)’인 베트남 문제 전문가는 ‘왜 조선전쟁의 결과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베트남전쟁은 통일로 종결됐을까’라는 제목의 분석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과 1973년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난 베트남전쟁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서로 크게 다르다고 분석했다.

우선 한국전쟁의 경우 전쟁에 간여했던 ‘완자(玩家·player)’가 미국, 소련, 중국, 대만과 남·북한 등 6개국이었다. 이 가운데 미·소·중 3개 대국이 주요한 플레이어였고, 나머지 3개 플레이어의 군사력은 3개 대국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쟁론’을 쓴 칼 폰 클라우제비츠(Clausewitz)에 따르면 “전쟁은 특정 국가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인데 한국전쟁 당시 북의 김일성과 남쪽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목적은 ‘자신이 주도하는 통일 한반도’로 서로 같았지만 다른 나라들은 다 달랐다. 당시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의 목표는 한반도에 미국과의 군사적 완충지대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소련 스탈린의 정치적 목표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연결될지도 모르는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회피한 채 기습을 당한 미국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를 체크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당시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세력 억지(containment)를 주장하던 세력과 주일미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을 대표로 하는 미국의 중국 복귀(rollback)를 주장하던 세력으로 서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트루먼을 대표로 하는 억지파의 정치적 목적은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맥아더를 대표로 하는 중국 복귀파는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간의 30년 내전에서 국민당을 지원했다가 국민당이 패배하는 바람에 세계 패권국가로서 체면에 손상을 입은 미국이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결국 트루먼 대통령에 의한 맥아더 장군 직위 해제로 미국 내에서 억지파가 승리했다. 당시 중국과 소련도 한반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한반도에 미국과의 완충지대를 만드는 것이 정치적 목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결론은 통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전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은 한반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베트남전의 경우 전쟁 과정에서 마오쩌둥에 의한 문화혁명이라는 정치적 혼란이 중국 대륙에서 진행됐다. 또 소련에서는 스탈린의 사망이라는 정치적 격변이 발생했다. 미국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베트남전쟁 후반 10년간 베트남전의 ‘완자(player)’는 존슨 대통령을 대표로 하는 미국과 남·북 베트남 3자밖에 없었다. 전쟁기간 군사력은 남베트남이 북베트남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통일을 바라는 열망이라는 점에서는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뒤져 있었다. 더구나 가장 강력한 대국인 미국의 베트남전쟁 목표가 땅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북베트남 군대를 대량 살상함으로써 북베트남 군대와 지도부의 전쟁 의지를 꺾어 전쟁을 종결시키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남·북 베트남 국민의 민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살상 위주의 전쟁을 하는 미군의 전쟁 행태에 대한 미국 내 비판도 거세어져서 결국 미군 철수와 북베트남의 승리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베트남 통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베트남과 한반도의 역사에 밝은 중국 블로거들은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중국과 한반도의 역사적 관계는 서로 다른 것이었다는 주장도 편다. 조선왕조의 중국에 대한 기본 태도가 진심으로 승복(‘眞心鐵服’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역사적 태도는 ‘표정은 복종하되 마음으로는 복종하지 않는 면복심불복(面服心不服)’이 기본 태도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의 경우 청에 아들을 인질로 보내는 조공체계를 구축했던 반면, 베트남의 경우 송(宋) 왕조 이후 점차로 독립적인 경향을 보이다가 결국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는 역사까지 남겼다. 베트남이 스스로 황제를 칭한 것은 조선과 특히 대비되는 대목이라는 것이 중국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실제 조선의 경우 중국에 맞서 황제를 자칭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칭왕(稱王)의 관례를 잘 지켜 왕실에 걸린 용 그림의 발톱마저 중국과 달랐다. 중국 황실 그림에서는 용의 발톱이 다섯 개인 데 반해 조선에서는 발톱이 네 개짜리 용만 그렸다는 역사적 사실도 남아 있다.

중국의 베트남 전문가와 많은 역사학자들이 블로그를 통해 “미국이 조선의 제2 베트남화를 겨냥해 하노이에서 트럼프·김정은 2차 정상회담을 기획했지만 조선이 제2의 베트남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자신감을 과시하는 배경에는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깔려 있다.

박승준 아시아 리스크 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