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작년 3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자서전 격인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1987)을 이 난에 소개한 바 있다.<주간조선 2499호 참조> 당시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북 회담을 전격 수용한 직후였다. 그로부터 꼬박 1년이 흐른 지금, ‘거래의 기술’을 다시 꺼내 본다. 과연 두 차례 미·북 회담을 거치면서 그의 기술은 얼마나 발휘되었을까.

트럼프는 반세기 동안 부동산 개발로 잔뼈가 굵은 비즈니스맨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독특한 협상 스타일을 확립했다.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판을 흔들어 자신의 스타일로 판을 새로 짠다. 크게 생각(think big)하여 판도 크게 짠다. 다양한 지렛대(leverage)를 만들어 판을 주도한다. 최고위층과의 담판을 통해 단번에 빅딜(big deal)을 시도한다.”

불과 1년여 전까지 한반도는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실험으로 인해 먹구름에 휩싸여 있었다. 2017년 말까지 핵 무력을 일정 수준 완성한 김정은은 작년(2018년) 신년사를 통해 비로소 유화적 태도를 내비쳤다. 남북 간의 특사 왕래를 거쳐, 지난해 3월 10일 우리 특사단이 트럼프에게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했다. 놀랍게도 그는 북한의 정상회담 요구를 즉석에서 받아들였다.

그만큼 트럼프는 전문가나 참모의 의견보다 자신의 감과 촉을 믿는 비즈니스맨이다. 또한 “중요한 협상을 하려면 최고위층과 만나야 하는 법”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곧바로 틸러슨 국무장관을 경질하고 후임에 폼페이오를 임명하며, 협상 채비를 서둘렀다. 이 협상만큼은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물밑에서 실무협상을 벌이는 동안, 북한은 지난해 4월 21일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라는 선수(先手)를 꺼내들었다. 드디어 5월 10일 트럼프는 트윗을 통해 ‘6월 12일 미·북 회담’을 예고했다. 북한도 5월 24일 외국 언론의 참관 속에 핵실험장 폭파 이벤트를 벌였다. 이런 선제조치를 통해 분명한 핵 포기 의지를 과시하며, 미국의 적극적 호응을 압박했다. 이로써 북한이 강력한 협상 지렛대를 하나 챙기나 싶었다.

하지만 역시 트럼프였다. 가만히 있지 않았다. 북한의 핵실험장 폭파 직후, 최선희의 적대적 발언을 문제 삼아 회담 취소를 전격 선언했다. 그는 북한이 애써 만든 지렛대를 순식간에 뽑아버렸다. 이에 당황한 북한이 김계관을 내세워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유화 메시지를 내놓았다. 그러자 바로 다음날 태연하게 회담 재개 의사를 표명했다. 다소 의도적인 소동을 통해 자신이 이 판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상대에게 분명히 각인시킨 것이다.

이처럼 트럼프는 협상을 앞두고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상대방의 기를 꺾으려 대든다. 이런 공세를 통해 상대를 위축시키고, 사전에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 바로 트럼프식 협상의 전형적인 기법이다. 그는 필요에 따라 입장이나 태도를 수시로 바꾸는 것도 전혀 꺼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표변(豹變)마저 협상전략으로 즐겨 사용한다.

특히 그는 언론과 싸우면서도 언론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내가 관여한 거래는 다소 허황돼 보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신문이 나를 주목하게 되어 내 기사를 쓰지 못해 안달을 하게 됐다.” 그는 회담 날짜나 장소와 같은 부수적 소재를 가지고도 한동안 언론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그는 전 세계가 좋든 싫든 그의 트윗을 챙겨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1차 미·북 회담은 아쉽게도 상징적 선언에 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년 동안 적대했던 양국 정상이 만난 것 자체만으로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2차 회담은 측정가능한 조치(measurable steps)를 담아야 했다. 쌍방은 이런 디테일을 놓고는 좀처럼 접점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 2월 6일, 트럼프 대통령은 2월 27~28일 베트남 미·북 회담 개최를 발표했다. 실무협상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회담 날짜부터 못 박고 나선 것이다.

그는 항상 최고책임자를 만나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담판을 짓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스타일은 서방 지도자로서는 특이하게도 김정은·시진핑·푸틴 등과 같은 철권 통치자들과 이른바 ‘케미’를 보일 소지가 있다. 아마 이번에도 트럼프나 김정은은 실무협상에 의존하기보다 오히려 상대와의 ‘통 큰’ 담판에 더 큰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스타일의 사람들은 일단 의견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예상 외로 크게 어긋날 수도 있다.

실제로 하노이회담은 실무 준비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럼에도 트럼프와 김정은의 스타일에 비추어 무엇인가 합의를 이루어낼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트럼프는 역시 ‘일괄타결’을 주장했고, 김정은은 ‘단계타결’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끝내 이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떠들썩한 회담은 노 딜(no deal)로 막을 내렸다. 일반적인 정상회담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격식에 별로 구애받지 않는 비즈니스맨이다.

이번에 볼턴은 수행단에 포함되지 않았다가, 막판에 ‘슬그머니’ 합류했다. 또한 트럼프는 김정은의 면전에서 “서두르지 않겠다”를 연발했다. 이런 것들은 다소 뜬금없는 조치나 발언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트럼프를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런 기만과 허풍으로 자신의 의중을 감추고 상대를 압박하는 것이 그의 협상전략 중 하나다. 동시에 이번 회담결과를 놓고 보면 그런 대응방식은 단순한 엄포만도 아니었다.

볼턴의 은밀한(?) 등장을 비롯해 여러 정황에 비추어 미국 측은 회담 결렬도 충분히 염두에 둔 징후가 드러난다. 비즈니스맨 트럼프에게는 회담장을 박차고 나오는 것이 별로 낯선 일도 아니다. 더구나 이번 노 딜에 대한 세평(世評)은 오히려 후한 편이다. 반면 노 딜을 미처 예상치 못하고 패만 다 내보인 김정은은 수령의 무오류성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두 차례 미·북 회담의 고비마다 ‘거래의 기술’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국제정치는 비즈니스와는 또 다르다. 비즈니스 협상은 결렬되더라도 그 기회를 포기하면 그만이다. 반면 국제정치에는 포기란 없다.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트럼프의 기술도 무한정 효과를 내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그의 기술은 끊임없는 노출로 진부화(陳腐化)되고 있다. 그렇더라도 초강대국의 수뇌라는 입지가 여전히 그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다.

이번 노 딜로 인해 북핵에 관해 ‘배드 딜’이나 ‘스몰 딜’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트럼프식 협상술은 얼어붙은 판에 구멍을 내는 원동력이자, 동시에 우리를 위태롭게 만드는 불안요소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는 1차 미·북 회담 당시 아무런 사전 교감도 없이 동맹 간의 군사훈련을 태연히 폄훼하는 그의 모습을 속수무책 지켜본 적이 있다. 그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무엇이든 기꺼이 협상의 재료로 활용하려고 한다.

현실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인간 트럼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긴요하다. 다소 낡아가고는 있지만 ‘거래의 기술’은 여전히 유익한 트럼프 파일이다. 그만 한 참고자료도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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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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