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1979년 중국과 벌인 국경 전쟁에서 승리했다. 2월 17일부터 3월 16일까지 한 달이 채 안 걸린 전쟁에서 중국은 베트남에 ‘교훈’을 주지 못하고 패배, 후퇴했다. 미국 자료를 바탕으로 한 우리 계산으로 당시 중국은 10개 군 30만명의 병력을 동원했으나, 정규군 10만명에 민병조직 5만명을 동원한 베트남에 패배했다. 물론 중국 측 입장은 다르다. 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검색 엔진 바이두(百度)에 따르면 “베트남의 끊임없는 국경 도발과 이웃 캄보디아에 대한 침공을 ‘바로잡기’ 위해 20만의 병력을 동원해서 작전을 벌인 결과 중국군 전사 2만7000명, 베트남군 사망 5만여명을 내고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철수라는 전과를 올렸다”고 기록돼 있다. 전쟁의 이름도 ‘베트남에 대한 보위 환격작전(對越保衛還擊作戰)’으로 정리돼 있다.

당시 베트남은 1975년 남북 내전에서 승리해 통일을 이룩한 후 경제적으로는 1950년대 마오쩌둥(毛澤東)의 노선을 택하고, 외교적으로는 소련 일변도의 정책을 채택했다. 미군의 철수 결정으로 내전에서 승리한 베트남 공산당은 남쪽 수도 사이공(西貢)을 호찌민(胡志明)시로 개명하고, 남부에 확산돼 있던 자본주의를 지워버리기 위해 전면 공유제를 실시했다. 중국이 보기에 당시 베트남은 “전쟁으로 입국(立國)하고, 전쟁으로 치국(治國)하던” 나라였다. 중국과의 국경전쟁을 치른 결과 국방비가 재정지출의 50%를 차지하는 전쟁국가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도 소련과의 관계만 열려 있고, 중국과 서방과의 관계는 꽉 막힌 폐쇄국가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85년 소련에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택하자 소련의 베트남에 대한 원조가 대폭 감소했고 베트남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1945년 독립을 선포한 후 1975년 남부를 제압하고 통일을 달성하기까지 30년 동안 국력이 소진될 대로 소진된 상황에서 소련의 원조가 대폭 줄어들자 통화팽창률은 800%에 달했고, 1인당 국민소득은 200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결국 1986년 12월에 개최한 베트남 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는 “통일 이후 11년간 당이 잘못 선택한 엄중하면서도 장기적인 정책적 과오를 반성하고, 인민의 역할을 망각한 채 경제공작과정에서 저지른 합리적인 규칙을 무시한 과오를 자아비판하면서 도이모이(혁신개방)정책을 채택하기로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베트남 공산당은 6차 당대회의 도이모이 결정으로 “시장시스템으로 운행하되 국가가 관리하고, 사회주의 방향을 견지한 채 다양한 상품경제 방식을 채택한다”는 노선을 채택했다. 베트남 공산당 6차 당대회는 이와 함께 ‘국영기업 자주경영에 관한 결정’ ‘외국투자법’ ‘국영은행과 상업은행을 구분하는 결정’ ‘농가의 자주경영과 토지사용 권리 확보에 관한 결정’ 등을 통과시켰다. 당시 베트남보다 8년 먼저 덩샤오핑(鄧小平)이 이끄는 개혁개방 정책을 택한 중국에서는 이미 빠른 경제발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베트남 공산당 6차 당대회 이후 5년이 흐른 1991년 6월에 개최된 7차 당대회는 “새로운 국제·국내적 정세에 따라 정치·경제·외교 정책을 전면 조정하고, 특히 경제 정책 면에서는 관료통치제도를 폐지하고, 법률과 계획, 정책에 따라 관리되는 시장경제 시스템을 채택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농업 분야에서도 개혁개방 정책을 택한 중국의 영향으로 1980년대 초부터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실시한 단위면적별 생산량 계약제를 인정했다. 1993년이 되자 베트남 국회는 ‘토지 전민소유제’를 전제로 한 15~50년 사용권 제도를 입법화했다. 이 역시 중국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학습한 결과였다. 당시 중국은 안후이(安徽)성 샤오강(小崗)촌을 시범 마을로 선정해 주민 자율결정으로 토지사유화를 인정하고, 토지와 주택의 50~70년 사용권을 허용하는 한편, 사용권을 사고팔 수도 있게 입법하는 과정을 거쳤다.

베트남 공산당 7차 당대회는 국민총생산에서 민간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을 10%에서 45%로 끌어올리는 결정을 내리면서 상품과 노동의 가격을 시장시스템이 결정하도록 하는 시스템도 채택했다. 1993년에는 전력과 우편, 항만운수, 석유가격, 화학비료 가격, 시멘트 가격을 제외한 모든 상품 가격을 정부가 아닌 시장이 결정하는 체제를 선택했다. 이와 함께 1992년부터는 다원적인 금융체계와 환율 활성화 정책을 채택하면서 고속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1996년의 8차 당대회, 2001년의 9차 당대회를 거치면서 시장경제화에 가속 페달을 밟은 결과 2001년에서 2006년에 이르는 기간 경제성장률이 6.89~8.17%에 이르는 성과를 달성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중국 다음으로 빠른 경제성장률은 베트남이 올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베트남 공산당은 정치개혁 면에서는 오히려 중국공산당을 앞지르는 속도를 기록했다. 2006년 4월에 개최된 제10차 당대회에서는 중국식 표현으로 ‘차액(差額)선거’ 방식을 당간부 선거 방식으로 채택했다. 차액선거란 당선자보다 후보자 수가 많은 선거를 말한다. 이전 선거는 이른바 ‘등액(等額)선거’ 방식으로, 당선자 수와 후보자 수가 똑같은 상황에서 인민들에게 찬반만 묻는 방식이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정치개혁에서 중국공산당을 훨씬 추월해서 당과 정부의 주요 직위에 당이 추천하지 않은 후보의 출마도 허용하는가 하면, 출마자 없이 선거구민들의 자유로운 무기명 투표를 통해 최고 득표를 한 사람이 특정 직위에 당선되도록 하는 자유투표제도도 도입했다. 물론 이런 정치개혁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중국이 1980년대 초부터 덩샤오핑 주도로 도입한 집단지도체제 덕분이었다. 현재 베트남 공산당의 권력구조는 당총서기와 행정부 수장인 총리, 의회 의장이 권력을 분점하는 집단지도체제다.

베트남의 경제 번영과 베트남 공산당의 선택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베트남 남부에서 피어났던 자본주의 경제를 1975년 통일 이후 질식 사망시켰다가 다시 소생시키는 과정으로 비친다. 중국공산당과 베트남 공산당의 성공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집단지도체제를 바탕으로 한 권력 승계의 투명성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북한 조선노동당이 중국공산당과 베트남 공산당의 시장경제 체제 선택의 길을 뒤쫓아가려면 무엇보다도 김일성·김정일식의 1인 지배체제를 김정은이 포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달성한 대한민국에서 우리 정치 지도자들의 의식이 혹시라도 1970년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8억인과의 대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베트남과 중국의 개혁개방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크게 각성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박승준 아시아 리스크 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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