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미·북 2차 정상회담 이후 워싱턴은 북핵 문제에 대한 관심을 잃은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북핵 문제에 대한 원칙론을 간간이 언급하기는 해도 ‘무엇인가 돌아가고 있다’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10여년 전 북핵 6자회담 시절, 대화가 공전할 때면 당시 협상 책임자였던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차관보가 베이징이나 도쿄, 서울에 가곤 했다. 북한과의 협상을 책임지고 있는 미국 관리가 움직이면 그것만으로도 ‘뭔가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일종의 안도감을 줬다. 하지만 그건 착시였다. 진행되는 일이 없어서 텅 빈 공간을 채우느라 일부러 여행 일정을 짜서 움직인 것이다. 그래서 비건 대표가 모스크바나 서울에 간다는 보도를 보면 대북 협상 실무 책임자로서 북한을 상대로는 할 만한 일이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트럼프 행정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지금 북한하고 뭔가 진행되는 일이 있나요?”라고 물어보면, 약속이나 한 듯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또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하지만 트럼프가 또 무슨 일을 할지 모르니까요”라고 덧붙인다.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북핵 문제에 관심을 둘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한다. 북한도 연말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지만, 트럼프로서도 내년부터 대선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 테니 북한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는 상황이란 것이다.

미국 정치 일정을 보면 정말 시간이 부족하다. 내년 초엔 민주당 예비선거가 시작된다. 미디어의 관심은 온통 그쪽으로 쏠릴 테지만 트럼프가 그 상황을 그대로 둘 리가 없다. 현직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지지자들을 꽉 붙들어둘 만한 일을 찾아낼 것이다. ‘그래서’ 트럼프가 북한에 관심을 두기 어렵다? 다른 대통령이라면 이렇게 얘기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트럼프는 다르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트럼프는 무엇인가를 할 수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성격 때문에 트럼프 정부의 입장에 관한 한 전문가의 분석이나 전망은 별 의미가 없다. 전문가들이 트럼프 행정부가 취할 입장에 대해 여러 가능성을 소개하고 분석하다가 마지막에는 꼭 “하지만 트럼프가 갑자기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든지, “통념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얘길 덧붙인다. 앞서 한 얘기가 다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그래서’가 트럼프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예측불허의 성격이란 것을 이용하려는 쪽에서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트럼프 취임 후 2년여를 지켜보니 미국의 국제정치학 교과서나 대통령론도 다 다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전직 대통령들과 현직 대통령을 비교하는 일이 잦은데 트럼프의 경우엔 너무 달라서 사실 비교라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성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북한 측은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에도 양국 지도자 간의 좋은 관계는 변함없다는 걸 강조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트럼프의 호의와 즉흥적 변심을 활용하겠다고 하는 건 정책도 전략도 아니고 그냥 위험한 도박처럼 보인다. 이미 하노이에서 증명됐던 것처럼.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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