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서 이상민 위원장이 공수처법·검경수사권 조정 신속처리안건을 의결하려고 하자 한국당 위원들이 항의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4월 2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서 이상민 위원장이 공수처법·검경수사권 조정 신속처리안건을 의결하려고 하자 한국당 위원들이 항의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법치국가에서 정치란 이해관계의 충돌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것이다. ‘동물국회’의 재현은 정치의 실종을 의미한다. 만약 4당이 공수처법과 검경수사권 법안만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려 했다면, 자유한국당의 육탄 저지는 명분이 취약하여 대중적 호응을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달은 군사정권 시절에도 하지 않던 선거법 강행처리를 밀어붙이면서 났다.

4당이 합의한 준(準)연동형 비례대표제는 현행 승자독식 선거제도로 인한 폐해를 완화해보자는 취지에서 고안되었다. 단 한 표 차이로도 당락이 갈리는 현행 소선거구제는 많은 사표(死票)를 발생시켜 비례성과 대표성의 온전한 구현을 저해하며, 죽기 아니면 살기의 극한투쟁을 유발한다. 또한 제1·2당 중심의 정치문화를 정착시켜 완충지대를 좁히고 진영대결을 격화시킨다. 다양화·다원화라는 사회 추세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선거제 개혁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문제는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이다. 승자독식의 폐해가 가장 극심한 곳이다. 한국의 대통령은 막강한 인사권과 예산권 그리고 사정(司正)권력을 행사한다. 여당 정치인들의 파워는 대통령과의 거리에 달려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누겠다. 권력기관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적폐청산이라는 미명하에 사법의 정치도구화는 심화되었고 이제 공수처라는 또 하나의 하명(下命) 수사기관을 손에 넣으려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신에 대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삼고초려해 일을 맡기겠다고도 약속하였다. 그러나 국회 인사청문 보고서 채택 없는 임명 강행은 이미 역대급이 되었고, 찍어내고 꽂아 넣는 ‘캠코더’ 낙하산 인사로 전 장관과 청와대 인사비서관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그대로 놔둔 채 국회의원 선출방식을 바꾸면, 진영 논리에 따라 춤추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병폐가 개선될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과 다당제 국회’라는 조합은 분권과 협치의 진전이 아닌 국회에 대한 청와대의 분할통치(divide and rule)를 강화시켜 견제와 균형이라는 삼권분립을 약화시킬 위험성이 높다. 고로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개선 없는 국회 구성방식의 변경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지금 최우선의 개혁 과제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지다. 제6공화국을 폐(廢)하고 제7공화국을 창(創)해야 한다. 6공 하면 흔히 노태우 정권을 떠올리는데, 우리는 지금도 제6공화국에 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6공의 일곱 번째 대통령이다. 탄핵은 박근혜라는 인물의 실패임과 동시에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제도의 실패였다. 그러나 청와대의 주인만 바뀌었을 뿐,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낡은 체제는 건재하다. 정부 개헌안을 법무부 장관이 아닌 청와대 민정수석이 발표한 데서 드러나듯이 ‘청와대정부’의 위력은 역대급이다. 붕어빵의 속을 팥으로 하건 생크림으로 하건 붕어빵의 자태에 변함이 없듯이,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틀에 보수와 진보 어떤 내용을 채워 넣든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세 차례의 평화적 정권교체 모두 6공에서 이루어졌지만,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완화되기는커녕 갈수록 커지고 있다. 흑백 논리와 선악 이분법에 근거한 진영 논리와 확증편향이 판을 치며 불신과 저주의 적개심이 온 사회를 휘몰아친다. 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 분열과 갈등의 정치도 바꾸겠다. 야당과의 대화를 정례화하고 수시로 만나겠다”고 한 약속은 허언이 되었다. 취임사의 핵심 내용이 모두 허언이 되고 마는 이 사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새 정치는 새 공화국에 담아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제하에서 진정한 공화국을 만드는 것은 어쩌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 분권과 협치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는 새로운 체제, 제7공화국만이 조선 후기 사색당쟁을 뺨치는 현재의 파당정치를 극복할 수 있다.

새로운 공화국의 탄생은 헌법 개정을 통해 탄생한다. 그런데 상당수 민초들은 권력구조 변경은 ‘그들만의 리그’이지 자신의 삶과는 무관한 문제로 치부한다. 정말 그런 것일까. 최근 사례 몇 가지만 살펴보자. 한국공법학회는 대법원장을 현행 대통령 임명이 아닌 판사들의 투표로 뽑아야 하며,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정 권한을 폐지 또는 제한해야 한다고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에 제안하였다. 정권의 개입으로 사법부 독립이 침해될 소지를 차단하자는 취지에서였다. 한국경영학회·한국경제학회·한국정치학회가 지난 4월 26일 공동주최한 ‘정부인가? 시장인가?’ 융합대토론회에 참석한 학자 100여명은 정부가 시장을 끌고 갈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문체부 소속 정부기관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지난 4월 25일 주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독일 ‘역사의 집’(법률에 의거해 박물관을 운영하는 독립기구) 모니카 뢰터 박사는 “역사를 정치 무기화하면 안 된다. 현대사박물관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강조하였다. 분야가 다른 이 모든 사례들이 가리키는 곳은 제왕적 대통령이다. 제왕적 대통령이 존재하는 한 진정한 사법독립도, 자유시장도, 역사 학습도 불가능해진다.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다년간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은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라는 저작에서 한국 정치를 중앙권력을 향하여 모든 활동적 요소를 휘몰아가는 소용돌이에 은유하였다. 원자화된 개인의 단순 집합체인 대중사회, 단일 언어와 문화로 인한 고도의 동질성, 중앙집권화의 오랜 전통, 중간 집단의 취약 등으로 오직 중앙권력만을 향해 돌진하는 상승기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일단 소용돌이가 일어나면, 그 거대한 흡입력은 모래알의 정치개체를 빨아들여 그 어떤 이성적 성찰도, 여야 간의 타협도, 정책을 위한 진지한 토론도 마비시키고 만다. 헨더슨의 처방은 분권화와 다양화였다.

한국 사회의 정치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높다. 정치를 만악(萬惡)의 근원이라고 욕하면서도, 모든 것을 정치를 통해 해결하려는 ‘만사(萬事)의 정치화’ 풍토가 만연하다. 공영방송의 인적 구성은 정권교체에 따라 ‘가조와 나조’가 각각 썰물처럼 빠지고 밀물처럼 들어온다. KB금융, 포스코, KT는 각각 1995년, 2000년, 2002년에 민영화돼 정부 지분이 전혀 없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장이 교체되고 전 정권 관련 비리 혐의로 수사 대상이 된다. 정치와 무관하게 자율적·독립적으로 운영되어야 할 부문에 대한 정치의 부당한 개입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런 풍토에서는 능력보다 연줄이고, 정상적 경쟁보다 모함과 비방이다.

정치를 만악의 근원이라는 불명예로부터 구출하여 정상 작동시키려면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수술이 필수적이다. 국가 최고권력에 새 피가 돌기 시작하면, 사회 전 분야에 자율과 책임의 새로운 기운이 빠르게 퍼져나갈 것이다. 제6공화국은 수술대에 올라야 한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