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또 난장판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당이 청와대의 들러리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한, 국회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고 살벌한 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사태의 궁극적 배후는 청와대를 앞세워 국정을 독점하려는 ‘제왕적’ 대통령이다.<주간조선 2534호 본란 참조>

그렇다면 민주적 대통령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이다. 그를 다룬 책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최근에 그의 리더십을 독특한 시각에서 재조명하여 새삼 주목받은 책이 있다. 바로 도리스 굿윈의 ‘라이벌들로 구성된 팀’(Team of Rivals·2005)이다. 부제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정치적 재능’이다.

이 책은 원문으로 1000쪽에 가까운 대작이다. 거기에는 링컨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양한 라이벌들도 각각 개성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들은 모두 라이벌에서 추종자로 바뀐다. 이 책을 바탕으로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화 ‘링컨’(2012)을 만들기도 했다. 아쉽게도 우리말 번역에는 ‘권력의 조건’(2007)이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이 붙었다.

이 책은 1860년 5월 공화당 전당대회부터 1865년 4월 링컨의 암살까지 5년 동안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링컨은 켄터키주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정규교육도 받지 못했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다가, 독학으로 스물여덟에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새로운 희망을 찾아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로 가서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한 차례 연방 하원의원으로 활약했지만, 상원의원 도전에는 연거푸 실패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노예제에 관해 인상적인 논쟁을 펼쳤다. 그의 상대는 노예제 문제를 주(州)의 자치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링컨은 “백인이 스스로 통치하면 자치지만… 그에 동의하지 않는 다른 사람(흑인)까지 통치하면 그건 자치가 아니라 폭정이다”라고 맞섰다.

이 논쟁으로 상당한 지명도를 얻은 링컨은 1860년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나섰다. 그의 라이벌은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슈어드는 뉴욕주 주지사 출신의 상원의원이다. 체이스는 오하이오주의 상원의원과 주지사 출신이다. 베이츠는 미주리주의 저명한 원로정치가다. 그들은 지역과 파벌을 대표하는 거물들이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슈어드의 승리를 예상했다.

당시에 노예제 문제를 둘러싸고 남북은 분열로 치달았고 북부 내에서도 대립이 분분했다. 링컨은 중도를 견지하며 좌우를 아우르려고 했다. 그는 노예제의 확산은 막아야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주에는 간섭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정의가 이긴다는 믿음을 갖되, 성급하게 움직이지 말자”고 호소했다. 그는 정력적인 연설 투어를 통해 지지층을 넓혀갔다.

그의 전략이 호응을 얻어, 예상을 깨고 그는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뽑혔다. 그 여세를 몰아, 11월 대통령선거에서도 승리했다. 그는 다양한 파벌과 지역을 대표하는 라이벌들로 무지개 내각을 구성했다. 무엇보다 슈어드에게 국무장관, 체이스에게 재무장관, 베이츠에게 법무장관을 각각 부탁했다. 나중에 전쟁장관으로 기용한 스탠턴도 과거에 한때 그에게 모욕을 안겨주었던 인물이다. 이처럼 그는 거물 라이벌들을 내각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최대 현안인 노예제 문제에 관해 당내에서조차 다양한 파벌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통령으로서 다양한 지역과 파벌을 두루 아우르는 일이 절실했다. 한편 라이벌들은 시골뜨기 대통령을 제치고 실제로는 자신들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런 사정들이 서로 어우러져 ‘라이벌들로 구성된 팀’이 출범했다.

링컨은 ‘노예해방을 통한 국가통합’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지만, 결코 섣불리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를 둘러싸고 갈갈이 찢겨진 나라를 다독이며, 불필요한 갈등을 피했다. 그럼에도 남북은 기어코 전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제야말로 노예해방선언이 불가피해졌지만, 링컨은 여전히 신중을 기했다. 마침내 북부군이 전세를 호전시키자, 반란주(남부)에 대해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그러자 남부의 노예들이 대거 북군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밖의 정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그는 흑인 병사들에게도 동등한 대우를 허용하라는 요구에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흑인 군대가 최초로 승리를 거두어 국민들이 열광하자, 즉시 그들에게 동등한 대우를 지시했다. 이처럼 그는 아무리 급해도 서두르지 않고 때를 살폈다. 그의 정책들이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받게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무엇보다 그는 개성 있는 라이벌들을 포용하고 격려했다. 그의 품성과 능력에 감복한 라이벌들은 더 이상 그를 시골뜨기로 여기지 않고,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다만 체이스 재무장관은 차기 대선에 나설 야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뒤에서 대통령을 비난하며 은밀히 선거운동을 준비했다. 그가 걸핏하면 사의를 표하자, 링컨은 임기 말에 그의 사표를 전격적으로 수용했다. 하지만 체이스는 당내 경선에 나서지도 못하고 주저앉았다.

전세는 교착상태를 벗어나, 결정적으로 북부의 우세로 기울었다. 이에 힘입어 그는 비교적 손쉽게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고심 끝에 마침 공석이던 대법원장 자리에 체이스를 지명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파격적 조치였다. 그는 노예제 폐지에 대한 체이스의 확고한 신념을 높이 평가했다. 체이스도 감격하여 대통령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다짐했다.

북부군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1865년 1월 수정헌법을 통해 전면적 노예해방이 단행되었다. 4월 6일, 마침내 내전이 막을 내렸다. 링컨은 남부에 대한 일체의 보복을 불허했다. 심지어 남부군 총사령관조차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로써 노예제는 폐지되고 나라가 다시금 하나로 되는 발판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는 4월 14일 남부연맹 추종자의 손에 암살당했다.

링컨은 놀라운 포용력을 발휘해 라이벌들로 내각을 구성했다. 그리고 그들이 각자 자기 분야에서 맘껏 능력을 발휘하도록 배려했다. 그는 연설 등을 통해 국민들과 허심탄회하게 소통했고, 수시로 전선을 방문하며 장병들을 격려했다. 또한 의원들을 만나거나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 진심 어린 협조를 구했다. 그는 한마디로 ‘대통령 모델’이라고 불릴 만하다.

‘라이벌들로 구성된 팀’은 정적들로 조화로운 원팀(one team)을 만든 링컨의 리더십에 관한 이야기다. 무엇보다 그의 포용력과 통합의 리더십이 돋보인다. 또한 그의 주도면밀한 중도주의도 인상적이다. 그는 아무리 필요한 정책이라도 성급하게 서둘지 않았다. 분열된 나라를 다독이며 때를 살폈다. 하지만 여건이 조성되면 자신의 구상을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이처럼 링컨은 대통령중심제에서 대통령 모델을 확고하게 정립한 위대한 지도자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청와대를 앞세워 자신의 뜻을 무조건 강요한다. 이로써 내각과 행정부를 무력화시킨다. 국민들과의 소통을 외면하고, 국회를 통치의 보조물로 여긴다. 더구나 이런 행태가 개선은커녕 요즘 한층 더 악화되고 있다. 단언컨대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는 ‘제왕적’ 대통령제 타파 여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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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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