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날 아침 신문에 한국이 개발한 3세대 원전인 APR1400이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부터 안전성 인증을 받았다는 소식이 실렸습니다. 7월에는 최종 설계인증까지 받을 예정이라네요. 사전 지식이 없었으면 무심히 지나칠 소식이었는데, 2년 전 예고 기사를 썼던 기억이 나서 다시 기사를 꼼꼼히 읽어봤습니다. 그러자 APR1400의 산파 역할을 했던 이종훈 전 한전 사장의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이 전 사장이 저와의 인터뷰에서 예고했던 내용이 현실화된 것은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찜찜했습니다.

80대의 이종훈 전 사장은 평생 원전 건설 현장을 누빈 엔지니어입니다. 1976년 고리 원전 1호기 건설 부소장을 시작으로 원전 건설 현장에서 땀을 흘렸습니다. 한국 원전 개발의 산증인이라 할 만한 그가 한국의 원전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며 얘기를 꺼낸 것이 미국 NRC의 인증 여부였습니다. 인터뷰 당시 이 전 사장은 “NRC라는 조직이 얼마나 꼼꼼한지 아느냐”며 인증 가능성이 높아진 APR1400의 우수성을 자랑했습니다. NRC가 설계 인증까지 할 경우 국산기술로 만든 APR1400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을 입증받는 셈이라며, 깐깐한 미국 시장에 우리 원전을 수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좋아했습니다.

2015년 3월부터 심사에 들어간 APR1400은 인터뷰 당시 NRC의 예비심사를 이미 통과한 상태였습니다. 이 전 사장은 일본의 미쓰비시와 프랑스 업체도 3세대 원전을 개발했지만 NRC의 예비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NRC가 안전성을 인증한 건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AP1000밖에 없는데 AP1000은 건설 중에 문제가 많이 발생했지만 우리 APR1400은 UAE에서 순조롭게 건설되고 있다며 자부심을 내보였습니다.

이종훈 전 사장은 APR1400의 탄생 주역 중 한 명입니다. 한국이 독자기술로 개발한 가압경수로형 원전인 APR1400은 1992년부터 10년간 2300억원을 들여 개발했는데, 그 개발 시동을 건 사람이 그였습니다. 그는 한전 자회사인 한국전력기술 사장으로 있을 때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는 G7 사업의 하나로 차세대 원전 개발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2000억원이 넘게 드는 개발비 조달이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는 영광 3·4호기 프로젝트 예산 일부를 떼내는 등 임기응변을 발휘하면서 APR1400 집중 투자를 밀어붙였다고 합니다. 그로서는 자식과도 같은 APR1400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APR1400이 날려온 낭보를 보면서도 찜찜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 정부의 탈원전 정책 때문입니다. 원전을 정상적으로 가동하고 수출하는 나라였다면 엄청난 희소식이었을 테지만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의미가 퇴색해버렸습니다. APR1400 미국 인증을 전하는 뉴스 댓글들도 온통 ‘세계 최고라고 인증받으면 뭐하냐’는 식이더군요. APR1400은 이미 국내에서도 ‘찬밥’ 신세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APR1400이 세계 최초로 상업운전에 성공한 것이 2016년 말 신고리 3호기 가동이었는데, 마침 대통령 탄핵과 촛불시위로 나라가 뒤숭숭할 때여서 거의 조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종훈 전 사장도 “세계를 상대로 한 절호의 홍보 기회를 우리 스스로 걷어차버렸다”며 아쉬워하더군요. 어찌 보면 APR1400은 때를 잘못 만난 비운의 명작(名作)인지도 모릅니다. APR1400이 앞으로 세계 최고 수준에 걸맞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요.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키워드

#마감을 하며
정장열 편집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