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로그램 원기 ⓒphoto 표준과학원
킬로그램 원기 ⓒphoto 표준과학원

무게(질량)를 나타내는 킬로그램(㎏)의 뜻이 달라졌다. 프랑스가 130년 전에 만들어서 애지중지 관리해왔던 원기(原器)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대신 우주의 모든 곳에서 적용되는 새로운 우주적 기준이 도입됐다. 이제 킬로그램은 빛을 구성하는 광자(光子)의 에너지와 빛의 색깔을 나타내는 진동수 사이의 비례상수인 플랑크 상수에 의해 정해진다. 7개 기본단위로 구성된 국제표준단위(SI)가 객관적·보편적인 ‘우주적 도량형’으로 발전한 것이다. 원기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할 필요도 없어졌다.

도량형은 국가 권력의 상징

길이·면적·부피·무게 등에 사용되는 도량형(度量衡)은 조세와 상거래의 질서 유지를 위해 도입되기 시작했다. 자와 저울이 바르지 못하면 상거래가 혼란스러워지고, 세금도 제대로 걷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량형은 달력과 함께 국가의 권력을 과시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언어와 문자만큼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충분한 국력과 기술력을 갖춘 국가만 독자적인 도량형을 가질 수 있다. 과거에는 성인의 몸이나 곡식의 낟알을 기준으로 삼았다.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왕과 신(神)을 내세우기도 했다.

우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식 도량형을 차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자적인 달력을 만들기 위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다듬었던 세종은 박연에게 명해서 우리 형편에 맞는 황종척(黃鍾尺)을 개발했다. 해주에서 생산되는 곡물 중에서 중간 크기의 기장 낟알을 기준으로 길이의 단위인 푼·촌(寸)·척(尺)을 정했다. 9촌 크기의 황종(黃鍾)을 전통 음악에서 사용하던 12율의 기준음으로 삼았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경작지의 면적을 나타내는 파(把)·속(束)·부(負)·결(結)로 구성된 결부법(結負法)도 만들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는 패전국에 자신들의 도량형을 강요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가 가장 먼저 했던 일도 ‘척관법(尺貫法)’을 정비해서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것이었다. 일본도 1909년부터 우리에게 자신들의 척관법을 강요했다. 거리를 나타내는 자(尺·3.03m)·리(里·4㎞), 면적을 나타내는 평(坪·3.3㎡)·묘·단보·정보, 무게를 나타내는 관(貫·3.75㎏)·근(斤)·냥(兩)·돈(錢)·분(分)이 모두 메이지 천황이 1891년에 제정한 것이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과학자들이 화려한 제국(帝國) 건설을 위한 획기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북극에서 파리를 지나 적도에 이르는 자오선의 길이를 1만㎞로 하자는 것이었다. 지구를 기준으로 정한 도량형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프랑스혁명의 혼란 속에서 천문학자 들랑브르와 메생이 이끈 두 팀의 측량대가 대서양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자오선의 길이를 실측했다. 무려 7년이 걸렸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오늘날의 ‘미터법’이다. 길이의 단위인 미터(m)는 지구 둘레의 4000만분의 1이고, 무게의 단위인 킬로그램(㎏)은 변의 길이가 1미터인 통에 들어있는 물 무게의 1000분의 1이다. 1812년 공식적으로 미터법을 공포한 나폴레옹은 ‘제국은 순간이지만 미터법은 영원할 것’이라는 글귀를 남겼다.

1875년 5월 20일에는 파리에서 17개국이 ‘미터조약’을 체결했다. ‘세계 측정의 날’은 미터조약을 기념하는 날이다. 1889년에는 백금 90%와 이리듐 10%를 혼합한 합금으로 길이가 정확하게 1미터인 ‘미터원기’와 무게가 정확하게 1킬로그램인 ‘질량원기’를 제작했다. 모든 자와 저울은 파리 근교의 세브르에 있는 국제도량형국(BIPM)이 관리해왔던 원기를 복제한 것이다. 서양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 황제가 1894년 미터원기(고유번호 10c)와 질량원기(고유번호 39)를 구입했다. 1905년 대한제국 법률 제1호가 미터법을 적용한 ‘도량형 규칙’이었다.

현재 1959년에 가입한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전 세계의 60개국이 미터조약의 회원국이다. 미국·라이베리아·미얀마를 제외한 전 세계 모든 국가가 미터법을 발전시킨 국제표준단위(SI)를 공식 도량형으로 채택하고 있다. 자와 저울을 통해서 전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나폴레옹의 꿈이 온전하게 실현된 셈이다.

19세기 말부터 과학·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지구를 기준으로 제정한 미터법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구는 완벽한 구(球)가 아니었고, 지구의 자전 속도도 일정하지 않았다. 정교하게 만들었던 ‘원기’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미세한 변화가 나타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실제로 처음에 만들었던 40개의 킬로그램 원기 중에는 0.07밀리그램이 늘어난 경우도 있었다.

결국 ‘지구’보다 더욱 완벽하고, 객관적이고, 안정한 기준이 필요하게 되었다. 지구의 한계에 갇혀 있을 이유도 없다.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빛’이 대안이었다. 1960년에는 빛의 파장을 이용해서 ‘미터’를 다시 정의했고, 1967년에는 세슘 원자에서 방출되는 특정한 파동의 진동수를 기준으로 시간의 단위인 ‘초’를 정의했다. 빛의 밝기를 나타내는 광도도 새로 정의했다.

올해부터는 킬로그램(㎏)과 함께 전류의 단위인 암페어(A), 온도의 단위인 켈빈(K), 물질량의 단위인 몰(mol)의 기준도 변경했다. 양자 입자의 에너지를 결정해주는 플랑크 상수(h), 분자들의 에너지 분포를 결정해주는 볼츠만 상수(k), 전자의 전하(e), 아보가드로 수(NA)가 새로운 기준이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주관적인 개입이 필요하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우주적 표준단위’가 만들어진 셈이다. 낯선 외계인도 그런 표준단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로운 국제표준단위가 일상생활이나 산업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주와 자연에 대한 과학적 해석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세상의 자연법칙을 결정해주는 기본상수는 더 이상 측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원소나 물질 1몰에 들어있는 원자나 분자의 수는 그 종류에 상관없이 정확하게 ‘6022해(垓)1407경(京)6000조(兆)’개가 된다. 물리학의 기본상수에는 실험오차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다.

‘평’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물론 우리가 우주 제국의 꿈을 당장 실현시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 세계가 사용하는 우주적 표준단위를 외면하고 우리만의 별난 단위를 고집할 이유도 없다. 1961년에 계량법을 제정해서 미터법을 도입한 우리는 2007년부터 미터법 이외의 단위에 대해서 벌금을 부과하는 적극적인 노력을 시작했다. 디지털 저울을 사용하는 대형 슈퍼마켓에서 육류와 채소의 양을 ‘근’이나 ‘관’ 대신 ‘그램’으로 표시하면서 문제가 훨씬 쉽게 해결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토지나 건물의 면적에 ‘평’을 사용하는 불편한 관행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정부의 강력한 제도 때문에 겉으로는 ‘제곱미터(㎡)’를 사용하면서도 현실에서는 ‘1평=3.305785㎡’의 불편한 변환공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메이지 시대에 만들어진 일본식 단위인 ‘평(坪)’을 우리의 전통 단위로 착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안타까운 일이다. 건설사가 ‘99.17제곱미터’(30평)가 아니라 ‘100제곱미터’의 아파트를 분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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