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8일 일본의 헬기 탑재 호위함 ‘가가함’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자위대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5월 28일 일본의 헬기 탑재 호위함 ‘가가함’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자위대 장병들을 격려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트럼프 미 대통령은 3박4일간의 일본 방문 마지막 날인 지난 5월 28일 일본의 2만7000t급 헬기 탑재 호위함 ‘가가함’(DDH-184)에 올랐다. 전용헬기 마린원을 타고 가가함 갑판에 내리는 트럼프 대통령을 득의만만한 표정의 아베 총리가 맞았다. 이날 미·일 정상이 앞으로 항모 역할을 기대하는 대형 함정에 올라 자위대 장병들을 격려하는 모습은 전시 때나 가능한 정상 간 회동으로 비쳤다.

미·일 정상이 함께 오른 ‘가가’라는 호위함의 명칭도 의미심장하다. 본래 가가함은 일본이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해 일으킨 태평양전쟁 때 미드웨이해전에서 미군이 격침시킨 항모의 명칭이다. 가가함 침몰 73년 만인 2015년 8월 또 다른 신형 가가함 2대를 일본이 진수시키자 중국은 ‘악마의 배’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태평양전쟁과 대륙 침략에 앞장섰던 항모의 부활로 받아들인 것이다. 당연히 국제사회에서도 일본이 헬기 탑재 호위함 가가함을 스텔스기인 F-35B의 이착륙이 가능한 항모로 개조하려는 의도를 주시해왔다. 여기에 역내 패권에 대한 일본 보수 세력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가가함에 트럼프가 올라타 일본 자위대를 격려한 것은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역내 패권 도전에 맞서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지원한다는 미국의 전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대 ‘사건’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태평양전쟁 항모 가가함의 부활

이 같은 전례 없는 미·일 군사동맹 강화는 최근 미국의 대(大)전략 변화에 따라 가속화하는 상황이다. 지난해 12월 시리아와 아프간 주둔 미군 철수 선언 이후 미국의 대전략은 세계 경찰관 역할을 수행하는 자유주의 패권 전략에서 경제 이익의 극대화를 노리는 ‘트럼프식 현실주의’로 급속히 이행해왔다. 트럼프 행정부가 동북아 지역에서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군사안보상의 책임 상당 부분을 일본에 넘기고 있는 것은 이 같은 대전략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 일본은 역내 동맹국 중 가장 앞장서서 미국을 지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역내 패권 쟁탈 구도가 미·중 경쟁에서 중·일 경쟁으로까지 확대되는 양상이다.

최근 미국이 동북아에서 일본에 넘겨준 가장 큰 책임은 역내 동맹 네트워크 구축의 주도권이다. 중국의 패권 저지를 위해 대중 동맹 네트워크를 미국이 직접 만드는 대신 일본에 그 책임을 떠맡긴 것이다. 아베가 2012년 총리 취임 이후 인도와 호주, 뉴질랜드 등과 추진해온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동맹 네트워크를 대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인도-태평양 전략’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도 2017년 11월 트럼프의 방일 때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역내 패권 도전국 지위로 급부상하고 있다. 머지않은 시기에 미국이 역내 주둔 군대를 감축하거나 철수할 경우 그 빈자리를 이어받아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 나서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모양새다. 트럼프를 가가함으로 초대한 것부터가 일본이 대중 군사 견제에 본격 착수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아베의 의도를 드러내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제는 일본의 이런 지위 변화가 우리의 안보에 큰 위협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도전은 아베 정권이 역내 자유주의 진영의 대중 견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한·미 간 균열 조장 의혹을 사면서까지 우리를 노골적으로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아베는 한·미 균열을 조장하나

이 같은 우려는 트럼프의 방일 기간에도 감지됐다. 일본의 일부 보수 언론들은 트럼프가 5월 26일 아베와의 만찬 회동에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뉘앙스의 말을 주고받았다’고 보도했다. 2·28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결렬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과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로 들릴 수 있는 말을 트럼프가 아베에게 했고, 이들 두 정상은 그 같은 상황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우려를 공유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보도는 ‘미·일 정상이 한국을 불신한다’는 인식을 주기 위해 일본 측이 트럼프와 아베 간 대화의 일부 내용을 고의적으로 유출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이 같은 의혹이 사실이라면 이는 일본의 한국 배제 움직임이 한·미 간 균열을 조장하는 수준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일본은 지난해 10월 30일 우리 대법원의 강제 징용 보상 판결 이후 압류한 일본 기업의 자산을 한국이 실제 매각할 경우 취할 각종 경제 보복 조치를 강구하고 있다. 일본의 보수 정치 세력이 일본 재계와 손잡고 차제에 한국이 일본에 도전할 꿈도 못 꾸게끔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1조5000억달러 이하로 완전히 주저앉혀버리겠다는 전략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실제 일본 재계의 보복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반도체 중간재 수출 중단 움직임, 대한(對韓) 투자 축소, 그리고 우리 기업들과의 컨소시엄을 통한 해외 프로젝트 입찰 중단 등의 사태가 현실화하기 시작했다.

대북 문제에서도 일본이 한국을 ‘주변화’시키기 시작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일본이 우리를 제치고 북한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 미·북 간 조정 역할에 나섰다는 의미다. 지난 2월 28일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 때 ‘만나고 싶다’는 김정은의 의사를 트럼프로부터 전해들은 아베가 지난 5월 2일 김정은과의 일·북 정상회담 개최 추진 의사를 밝힌 것이 대표적이다. 아베는 이날 회견을 통해 조건 없이 김정은을 만나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고 싶다고 밝혔다. 아베는 5월 27일 트럼프와의 공동 회견에서도 이를 재확인했다.

아베의 목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역내 패권을 거머쥐는 데 있다. 역내 주둔 미군의 감축 또는 철수가 현실화할 경우 미국을 대신해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승리해 ‘21세기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하겠다는 것이 아베의 구상으로 보인다. 미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인 로버트 케이건은 ‘정글의 귀환’이라는 저서에서 일본이 미군의 역내 철수 가능성에 대해 주목한 시점이 2013년이라고 지적한다. 당시 미국이 시리아 사태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는 것을 본 아베가 미국이 조만간 동아시아에서도 철수할 가능성이 있다는 데 주목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은 아베가 2013년부터 미군의 역내 철수를 대비해 패권에 대한 야심을 키워왔다는 점을 보여준다.

아베가 미국의 빈자리를 이어받아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 나서기 위해 2016년 8월 수립한 것이 인도-태평양 전략이다. 필리핀의 동아시아 전문가인 리처드 J. 헤이다리안은 ‘아시아의 새로운 전쟁터’라는 저서에서 아베가 2012년 총리로 다시 선출된 직후부터 중국의 해군력 증강을 우려하는 인도양과 태평양 국가들 간 전략 동맹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다고 말한다. 아베의 목표는 역내 해상 지배를 둘러싼 미·중 경쟁의 한가운데로 일본이 뛰어들게 만드는 데 있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당시 이 전략은 주변국들 간에 큰 논란을 촉발했다. 아베가 이 전략을 앞세워 추구하는 욕망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점은 오늘날 일본 국내 정치를 주도하고 있는 보수 세력이 20세기 전반 ‘쇼와 육군’의 후예들로 의심받는다는 사실이다. 아베의 외조부는 미 군정에 의해 체포된 뒤 복역을 했던 인물로 1960년대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다. 그는 도조 히데키의 전시 내각에서 상공부 장관을 맡았던 인물이다. 사실 아베 집안의 정치적 기반은 기시 전 총리다. 그런 만큼 전범들을 추모하기 위해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아베의 마음 한구석에 ‘대동아공영권 구상의 21세기적 실현’이라는 로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일 수밖에 없다. 이는 2001~2016년까지 집권하면서 전후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감행했던 고이즈미의 토로에서도 읽힌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아시아 특파원인 제프 다이어는 ‘세기의 결전’이라는 저서에서 고이즈미가 자신의 참배 습관에 대해 “가슴의 문제”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현 일본 정부와 지도부가 2차대전 책임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피해국들에 성의 있는 보상마저 거부하는 모습은 태평양전쟁 종전 때 일본 육군의 수뇌부가 보였던 모습과 똑같다. 쇼와 육군 전문가인 호사카 마사야스는 그의 책 ‘쇼와 육군’에서 일본 육군 수뇌부 중 패전 책임을 지고 자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일본의 보수 세력이 보여주는 모습도 쇼와 육군 수뇌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는 아베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당시 ‘내각 결의에 의한 사과를 해달라’는 우리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총리 개인 명의’로 사과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아베의 태도와 관련해 아오키 오사부는 ‘아베 3대’라는 저서에서 아베가 외조부 기시 전 총리를 존경한다고 자주 언급하는 것과 달리 1930~1940년대 반전평화주의자로서 이름이 높았던 친조부 아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한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2015년 8월 진수된 신형 가가함 2대. 앞으로 F-35B의 이착륙이 가능한 항모로 개조될 예정이다. ⓒphoto 뉴시스
2015년 8월 진수된 신형 가가함 2대. 앞으로 F-35B의 이착륙이 가능한 항모로 개조될 예정이다. ⓒphoto 뉴시스

쇼와 육군의 후예들

일본은 이 같은 한계 때문인지 아시아의 리더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특정 국가에 대한 협량한 태도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환태평양 국가 중 유독 한국에만 CPTPP(포괄적이고 점진적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2017년 미국이 탈퇴한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를 이어받은 기구) 가입을 권유하지도, 돕지도 않았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커트 캠벨 전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축’이라는 저서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TPP 가입 희망을 표명했을 때 오바마가 돕겠다고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베는 한국의 TPP나 CPTPP 가입을 돕겠다는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베 정권은 우리 대법원의 강제 징용 보상 판결에 항의하면서 한국이 CPTPP에 가입을 신청하면 반대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원래는 가입을 도우려 했는데 징용 배상 판결 때문에 이젠 돕지 않겠다는 식으로 진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베판 애치슨라인’

아베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일본 보수 세력이 추구하는 역내 질서가 ‘의사(疑似) 자유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낳는다. 그 까닭은 일본이 제도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것은 맞지만 그 본질을 들여다보면 법의 지배와 평화 등의 가치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나라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쇼와 육군에 의해 유린당한 국가들이 만족할 때까지 사과하기를 거부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증거다. 케이건은 앞의 책에서 일본의 보수 세력은 일제의 전쟁 범죄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계속되는 사과 요구에 대해 “더 이상의 사과를 어떻게 할 수 있느냐”는 ‘사과 피로 증후군’에 걸려 있다고 말한다. 일본의 이런 태도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추진 과정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아베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선언한 2016년 이후 인도양과 태평양이라는 두 대양을 연결해 아시아의 평화와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명분 아래 인도와 호주, 뉴질랜드를 방문한 뒤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동남아 국가들을 모두 방문했다. 하지만 취임 이후 2018년 2월까지 한국은 찾지 않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대중 견제 전략으로서 인도-태평양 전략을 추진하면서 한국의 동참을 권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은 중국의 패권 추구로 인한 비자유주의화 위기라는 가장 큰 안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도 그는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참석 이전까지 한 번도 한국을 찾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제 행사에서 이뤄진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한 참여를 요청하지 않았다. 평창올림픽 개막식 참석도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2020년 도쿄 하계올림픽 개최국 정상으로서 오지 않을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때문에 아베가 2015년부터 3년간 신년사를 통해 “한국을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 나라”라고 말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배제시킨 한국과 무슨 전략적 이익을 공유한다는 말인가. 그는 지난해 신년사부터는 이 말조차 뺐다.

그렇다면 아베는 왜 한국을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배제해왔는가. 아베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목표가 아시아의 발전이든 중국 견제든 한국을 배제한 채 추진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아시아의 주요 국가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패권 추구로 인한 비자유주의화라는 안보 위기에 역내 그 어느 나라보다 정면에서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을 배제하려는 아베의 의도와 관련된 가장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는 중국의 탄도미사일 사정권 안에 들어 있어 실질적으로 방어가 어려운 한국을 차제에 중국의 패권 지배권으로 넘기려는 것이 아니냐는 설명이다. 그러니까 인도-태평양 전략의 대중 방어 전선은 일본-뉴질랜드-호주-동남아-인도로 이어지는 라인이 되고, 여기서 한국을 빼자는 것이 일본의 전략일 개연성이 있다. 만약 아베가 이 같은 의도를 갖고 있다면 인도-태평양 전략은 ‘아베판 애치슨라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이는 2018년 말 발발한 일본 초계기 조사(照射) 논란 사태에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당시 동해상에서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초계기를 향해 우리 구축함 광개토대왕함이 레이더를 쐈다고 일본 방위성이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일본의 주장은 “어떻게 동맹국의 초계기를 향해 한국의 구축함이 조사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양국이 더 이상 동맹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 당시 일본의 속마음이었다. 이런 의중은 방위성의 문제 제기 이후 아베가 취한 조치에서도 읽을 수 있다. 우리 국방부가 일본의 의혹 제기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자 아베는 초계기 조종사들의 음성파일을 공개하도록 지시함으로써 갈등을 증폭시키고 나섰다. 아베의 이런 태도는 일본이 마침내 한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중국 진영으로 떠넘기기 위한 보이지 않는 작전에 착수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인도-태평양 전략서 한국 배제하는 이유

만약 이 같은 의심이 합리적인 것이라면 그 배경과 이유가 뭘까. 우선 한국에 대한 단순한 미움을 꼽을 수 있다. 아시아에서 일본과 마찬가지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잘 실현하면서 과거 식민지와 침략에 대한 책임과 사과, 보상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한국과는 뭐든 함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시아에서 IT를 비롯한 일부 최첨단 산업에서 일본을 앞지르는 한국이 경제적 라이벌로 급부상하자 어떻게든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또 머지않은 시기에 미군의 역내 철수가 이루어질 경우 그 빈자리를 한국과 분점하게 되는 상황을 막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본의 한·미 간 균열 시도는 이전부터 있어왔다. 아베는 2017년 11월 일본을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인도-태평양 전략에 미국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아베가 연출한 인도-태평양 전략 ‘드라마’의 하이라이트가 트럼프의 다음 목적지인 한국을 방문했을 때 벌어졌다. 트럼프가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 도중 예상치 못한 의제 하나를 제안한 뒤 회담 결과 발표문에 명시하자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인도-태평양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한 번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없고 국제행사에서 한국 정상과 만났을 때조차 제안하지 않았던 이 전략을 아베가 트럼프를 통해 떠본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는다. “아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게 있으니 한번 참여해 보겠느냐”고 트럼프를 통해 전달했다는 의미로, 말하자면 아베가 한국을 ‘갖고 논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아베가 트럼프를 통해 느닷없이 제안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 목적은 한·미 간 균열을 노렸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정부가 미국과의 동맹에 대한 의지가 약한 진보 정권인 만큼 그 같은 갑작스러운 제안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노리고 트럼프에게 그런 요청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미 관계의 균열을 통해 한국보다는 일본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보수 세력이 북한의 위협과 이에 대한 한국의 대응 기조를 자국 이익 극대화를 위해 활용해온 것은 크게 네 가지 측면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북한의 핵 실험과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일본의 안보 위기 고조로 연결시킴으로써 총선거와 지방선거의 승리를 위한 불쏘시개로 이용해왔고, 실제로 이것이 선거 승리에 기여를 해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위대를 이른바 ‘전쟁할 수 있는 군’으로 만들기 위한 헌법 개정과 전력 강화를 위한 명분으로 북한의 위협을 내세워왔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한국의 진보 정부가 북한에 대한 압박과 제재보다는 남북 대화에 더 중점을 두면서 한·미 간 보이지 않는 갈등이 나타나자 이를 미·일 동맹 강화를 위해 활용해오고 있다는 측면이다. 아베는 이 모든 것을 기반으로 앞으로 중국과 패권국 지위를 둘러싸고 본격적인 경쟁을 벌이는 데 가장 중요한 수단인 핵무기 보유를 위한 명분도 쌓아오고 있다고 봐야 한다. 현재 일본의 플루토늄 보유 분량은 핵무기 6000개를 제조할 수 있는 47t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두 번의 미·북 정상회담 개최 전후 아베가 보여준 행보는 그가 진짜 북한의 비핵화를 바라는지를 의심케 만든다. 그는 트럼프와 김정은 간 회담 개최가 결정됐을 때마다 매번 워싱턴을 방문해 일본인 납북 문제를 회담의 주요 의제로 다루어줄 것을 떼를 쓰다시피 요청했다. 그의 요구대로 납북 일본인 문제가 주요 의제가 되면 회담이 북한의 비핵화에 오롯이 초점을 맞추기 어려워진다. 주목할 것은 지난 하노이 회담의 유일한 성과가 김정은이 트럼프에게 아베를 만나겠다고 말한 것 정도로 그쳤다는 사실이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그의 책 ‘중국론’에서 중국은 북한의 핵 보유가 주변국의 핵 도미노로 이어질까 우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중국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미군의 역내 철수 시 그 빈자리를 차지해 자신들과 패권을 다툴 것이 분명한 일본의 핵무장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아베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문재인 정부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지정학적 세력 균형의 대일 외교를 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민족주의적 한풀이식 대일 외교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20세기 초 영국의 고위 외교관이었던 에어 크로는 “구도가 안정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현 상황에 이 말을 대입하면 일본의 인도-태평양 전략이 우리의 안정을 위협하는 구도로 발전되지 않도록 시급히 전략적 관리에 나서야 한다는 의미다. 일본이 21세기적 군국주의 국가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장기적인 대일 관여 전략도 추진해야 한다. 일본의 국가 경영 세력이 메이지유신과 쇼와 육군의 유산을 잇는 현 보수 세력에서 반도와의 교류를 중시했던 평화 중시 세력으로 교체되도록 장기적인 안목에서 힘써야 한다. 일본의 정치를 밑바닥부터 바꾸기 위한 장기 전략이 어느 때보다 시급한 상황이다.

이교관 전략국가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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