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개혁 논란으로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다. 개혁의 필요성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하지만 구체적 방도를 놓고는 중구난방이다. 여야 간의 공방이 치열하고, 사법기관 간의 갈등도 첨예하다. 이로 인해 실타래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엉켜만 간다.

이런 현실을 차분히 돌아보게 만드는 문서가 최근 미국에서 공개되었다. 바로 로버트 뮬러 특검의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통령선거 개입에 관한 수사 보고서’다. 흔히 ‘뮬러 보고서’(The Mueller Report·2019)라고 불린다. 이 보고서는 다양한 형태의 책자로 여러 종류가 발간되었다. 수사 보고서로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또한 미국 법무부 웹사이트에도 448쪽의 전문(全文)이 그대로 공개되어 있다. 아무 제한 없이 누구나 접근해 볼 수 있다.

2016년 대선에서 소련 정부가 트럼프 후보의 당선을 돕기 위해 온라인 공작을 벌였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그해 7월 FBI는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고도 수사는 계속되었다. 그런 와중에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5월 이 수사를 지휘하던 코미 당시 FBI 국장을 돌연 해임했다. FBI 국장의 중도 해임은 이례적인 일이다. 더구나 코미가 대통령의 수사중단 압력을 주장하고 나서자, 특검 도입의 여론은 한껏 고조되었다.

당시 법무장관 세션스는 선거캠프 출신이다. 그는 이해충돌을 이유로 이 사건 전반에 관한 지휘 권한을 포기했다. 그러자 차관인 로젠슈타인이 장관대행의 권한으로 곧바로 뮬러 전 FBI 국장을 특검에 임명했다. 특검은 그로부터 거의 2년간 수사를 벌인 끝에, 올 3월 보고서를 제출했다. 논란 끝에 4월에 보고서 전문이 공개되었다. 총 2권 중 제1권은 러시아의 개입 및 트럼프 캠프의 관여 여부를 다룬다. 제2권은 대통령의 사법방해 여부를 살펴본다.

제1권에서 특검은 러시아 정부가 두 가지 방식으로 미국 대통령선거에 개입했다고 결론 내린다. 하나는 소셜미디어 캠페인(social media campaign)이다. 푸틴과 절친한 재력가가 인터넷 활동조직(Internet Research Agency·IRA)을 꾸려 트럼프 후보에게 유리한 온라인 공작을 벌였다는 것이다. IRA는 이미 2014년에 사람들을 미국에 보내 미국의 선거과정을 조사하고, 미국 사람 및 조직의 명의로 인터넷 계정 등을 확보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른 하나는 러시아 군(軍)정보기관(GRU)의 해킹이다. GRU는 클린턴 후보에게 타격을 줄 목적으로 민주당 측의 이메일을 해킹하여 익명이나 위키리크스 등을 통해 공개했다. 실제로 이메일 해킹과 공개는 대통령선거 판도에 직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검은 IRA와 GRU를 기소했으나, 상징적인 조처일 뿐 사법적 실효를 거두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과연 트럼프와 그의 캠프가 사전이든 사후든 러시아 측과 공모 또는 협력을 했느냐다. 트럼프 측 인사들이 러시아 측 인사들과 접촉, 통화 등 석연치 않은 정황이 다수 포착되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수사과정에서 특검에 거짓말을 했다. 이로 인해 무려 30여건이 위증혐의로 기소되었고, 아직도 사법적 절차가 끝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특검은 러시아 측과의 공모나 협력을 단정할 만한 결정적 증거는 밝혀내지 못했다.

제2권은 트럼프 대통령의 사법 방해 여부를 담고 있다. 특검은 트럼프 대통령이 끈질기게 FBI 및 특검의 수사를 저지시키려고 한 정황을 파헤친다. 대통령은 자신의 뜻을 거스르고 수사에 의욕을 보이는 코미 FBI 국장을 전격 해임했다. 세션스 법무장관이 이해충돌을 내세워 이 사건을 회피하려고 하자 이를 만류했다. 또한 도널드 맥칸 보좌관에게는 특검 해임 검토를 지시했다. 하지만 세션스나 맥칸 등은 대통령의 요구 또는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

현직 대통령은 재임 중 형법상 소추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특검은 제2권 모두(冒頭)에서 사법방해에 대해 유무죄를 단정 짓지 않고 수사 내용만 정확하게 제시하겠다고 밝힌다. 하지만 보고서를 훑어보면, 자잘한 건(件)은 많아도 확실한 ‘한 방’은 없다. 코미 해임은 대통령의 인사권 행사라는 명목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의 부당한 지시도 참모나 관료들의 거부로 대부분 실현되지 않았다. 또한 대통령은 수사기관에 직접 압력을 넣지도 않았다.

따라서 특검의 결론은 다소 애매하다. “이 보고서는 대통령이 유죄라고 결론 짓지 않지만, 그것이 그의 혐의를 없애주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이 보고서는 객관적 사실만 적시했을 뿐 그에 대한 사법적 유무죄 판단은 유보했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해 의회가 정치적 판단을 하거나, 퇴임 후 소추를 받을 길은 열려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우리는 이 보고서에서 몇 가지 교훈을 도출해볼 수 있다. 첫째로, 미국의 사법은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해 무자비하다. 특검은 현직 대통령에 관련된 사건을 1년 반 동안 샅샅이 수사했다. 2800명에게 소환장을 발부했고, 500여건의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500여명의 증인을 심문했고, 140만쪽의 기록을 검토했다. 비록 ‘결정적’ 혐의는 발견하지 못했으나, 대통령 최측근을 비롯해 다수의 인사들을 위증혐의로 법정에 세웠다.

둘째로, 소환이나 압수수색 등으로 불가피하게 노출되는 수사활동 이외에는, 보고서가 제출되는 순간까지 수사내용이 단 한마디도 새어나가지 않았다. 대통령을 비롯해 전 국민이 보고서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 숨죽이고 기다려야 했다. 피의사실 공표라는 정치놀음이 일상화된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정치놀음은 사법기능을 망가뜨리는 악습이다.

셋째로, 대통령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한 참모나 관료가 적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대통령의 요구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다면, 대통령과 그들 자신은 가차 없이 사법적 그물망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하여 그것이 한낱 ‘호통’으로 비치게 만들었다. 이로써 자신들의 명예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대통령의 안전을 지켜냈다.

아울러 온라인 시대에 걸맞게 국가 안보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대비가 필요하다. 미국 같은 기술선도국도 적대국의 악의적 소셜미디어 공작이나 해킹 공격에 무방비였다. 민주국가의 선거가 적대국의 공작에 의해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댓글이나 클릭 수에 목을 매는 우리 정치야말로 이런 공격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이처럼 이 보고서는 우리의 사법개혁에 대해 상당한 방향성을 시사해준다. 우리처럼 사법기관이 ‘죽은’ 권력에 벌떼같이 달려들고 ‘살아 있는’ 권력에는 벌벌 떠는 환경에서는 어떠한 제도적 개선도 무의미하다. 또한 피의사실 공표를 통해 정치 캠페인을 벌이는 악습도 반드시 끊어야 한다. 더불어 측근이나 관료들이 독립적 판단에 따라 정당함을 지키려는 노력도 절실하다. 사법개혁은 이런 점들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는 방향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의 사법 시스템은 정치적 악용 및 그에 대한 영합으로 골병이 들었다. 특히 무분별한 피의사실 공표는 엄격해야 할 사법기능을 정치적으로 변질시켰다. 이런 폐해를 방치한 채 벌이는 개혁은 결코 진정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사법기관의 정예역량을 여전히 국정과제 관철에 총동원하면서 사법개혁을 논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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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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