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생활을 하면서 국정원 직원들과 심심치 않게 어울렸습니다. 과거 서울 광화문 일대에는 ‘IO’로 불리는 국정원 정보담당관들이 득실거렸습니다. 정부 부처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공공기관이나 심지어 언론사까지 다 담당관들이 있었습니다. “무슨 스파이들이 대놓고 출입하냐”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주변의 낯익은 스파이들이 당시에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국정원 IO들에게 기자는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너무 깊게 사귀다가 선을 넘으면 큰 화를 자초할 대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IO들은 기자들과의 불륜을 즐겼습니다. 이들은 “세상 돌아가는 진짜 얘기가 궁금하다”며 기자들과 어울려 밥을 먹고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아는 것과 기자들이 아는 것을 위태롭게 주고받았습니다.

당시 대다수 IO들이 입에 담고 있던 말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였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조국과 민족이 도대체 뭘 지칭하는지 자주 헷갈렸지만 이들의 사명감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이들은 설렁탕을 먹다가도 ‘상황’이 발생하면 숟가락을 놓고 쏜살같이 달려갔고, 멀쩡해 보이는 외국인을 몇 달간 죽자고 미행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진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주워들었습니다. 필드에서 뛰는 IO들이 정보경찰관의 보고서를 대신 작성해주는 것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실력과 열정은 비교적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의 불륜을 즐기다가 경을 친 IO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국정원이 지금의 내곡동 청사로 이사올 때 일입니다. 잦은 설계 변경과 자꾸 늘어나는 공사비 등으로 내부 불만이 적지 않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최고 정보기관의 주차장이 인공위성으로 감시받는 지상에 건설되고 있다는 불만이 있었습니다. 자동차 숫자만 계산하면 직원 숫자가 다 알려질 수 있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이런저런 내부 얘기를 담아서 기사화했는데 기사가 나온 다음 우려하던 대로 몇몇 IO들이 고초를 겪더군요. 하지만 고초를 겪고도 IO들은 불륜의 단맛을 쉽게 끊지 못했습니다.

사실 국정원 자체가 과거 권력자들에게는 중독성 강한 음식 같은 존재였습니다. 집권 초기에는 ‘확 바꾸겠다’ ‘정치 관여를 금지시키겠다’고 나섰다가 실핏줄같이 촘촘한 IO들의 보고서 맛에 중독돼버린 사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국정원에서는 그런 권력자로 기억되는 듯합니다. ‘바꾸겠다’는 일성이 나중에는 ‘고마운 존재’라는 식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내곡동 국정원을 3번이나 찾아 가장 많이 국정원을 방문한 대통령으로도 기억되고 있습니다.

국정원의 추억을 떠올린 것은 최근 서훈 국정원장과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의 저녁 회동이 까발려진 후폭풍 때문입니다. 국정원장의 거동이 동영상으로 촬영될 만큼 동선이 낱낱이 까발려진 적이 있나 싶기도 하지만, 국정원 환골탈태를 이끌어온 서훈 원장이 여권 실세를 만난 모습이 썩 석연치 않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얼마 전 서 원장을 사석에서 만난 한 인사가 ‘원장이 북한 문제보다 국정원 개혁에 사실 더 욕심을 낸다’는 말도 건넨 터였습니다. 국내 담당 조직을 다 없애 이제 원장만 필드에 남았나 하는 실없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그나저나 광화문에서 젊음을 불살랐던 IO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요.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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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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