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친구와 둘이서 제주도를 여행하다가 협재굴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남들이 다 나올 때 맨 마지막 손님으로 굴에 들어갔는데 안내데스크 직원이 마지막 손님을 깜빡하고 동굴 안 전등을 꺼버린 겁니다.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이 어떤 것인지 그때 실감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당황해서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려가면서 한 발짝씩 더듬거리며 나가다가 곧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돌부리에라도 걸려 넘어지면 더 큰 일이라는 걸 깨닫고 무모한 시도를 아예 포기해버린 겁니다. 그리고는 친구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다음날까지 밤을 새기로 했습니다. 부질없는 시도를 포기해버리자 마음이 그렇게 편해지더군요. 색다른 경험을 즐겨보자며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을 굳히자 바로 옆 친구의 얼굴도 지워버린 어둠이 불편하거나 두렵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안내 직원이 퇴근하러 버스정류장까지 갔다가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돌아와 30여분 만에 암흑에서 벗어났지만, 그때 발상의 전환과 때론 포기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흔히 포기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을 합니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는 이유로, 자존심이 상한다는 이유로, 혹은 그냥 우유부단한 성격이어서 수렁에 빠져드는 징조가 보이는데도 그만두지 못하고 안되는 일에 계속 매달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다. 심리학자들의 실험에 따르면 제때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은 안되는 걸 억지로 붙들고 있는 사람보다 오히려 자존감이 높다고 합니다. 얼마 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의 심리학자인 아듬 디파울라 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빈칸에 낱말을 채우는 아주 어려운 ‘추론’ 과제를 사람들에게 풀어보라고 준 후 바로바로 정답과 오답을 알려주면서 실험 참가자 전원에게 ‘하위 30% 실력’이라고 통보했습니다. 과제 풀이에 실패했다는 피드백을 준 것이죠. 그리고는 문제를 바꿔 한 그룹에는 다른 과제를 한 번만 주고, 또 다른 그룹에는 여러 차례의 과제를 줬습니다. 그리고는 계속 실패했다는 피드백을 던졌습니다.

이후 실패자들에게 추론 말고 창의성 테스트 같은 다른 과제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대안을 제시하자 자존감이 답을 갈랐다는 겁니다. 즉 여러 차례 실패한 그룹에서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들이 계속 실패한 과제를 과감히 포기하고 다른 도전에 나서보겠다고 한 반면,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계속 망한 과제에 매달렸다는 겁니다. 한 번의 과제만 준 그룹에서는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 다시 도전에 나선 반면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람은 한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얼른 과제를 바꿨다는 겁니다. 결국 이 실험 결과에 따르면 한 번의 실패와 재도전 정도는 자존감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행태지만 자꾸 실패하는 과제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얘기입니다.

이 실험 얘기를 어느 학술지에서 보면서 이 정부, 문재인 대통령의 자존감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공약 중 상당수는 비틀거리면서 실패의 징조를 내보이고 있습니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주52시간에 갇힌 경제는 비명을 지르고 있고, 탈원전은 여의도 34배에 달하는 태양광 부지부터 마련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공약을 계속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이미 재도전 정도는 넘어선 상황으로 보이는데 포기할 줄 아는 용기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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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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