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은 못생긴 사람들의 할리우드(Washington is Hollywood for ugly people)’라는 말이 있다. ‘정치는 못생긴 사람들의 쇼 비즈니스(Politics is show business for ugly people)’라는 말도 있다. 워싱턴 사람들끼리 자주 하는 농담인데, 누가 시작했을까 검색해보니 폴 비걸라(Begala)라는 정치평론가이자 컨설턴트가 1980년대에 처음 한 말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은 대중을 상대로 뛰어난 연기력을 발휘하고 할리우드 스타만큼 유명한 정치인들의 도시다. 대중의 관심과 사랑에 죽고 사는 정치와 연예 비즈니스는 확실히 비슷한 데가 있다.

며칠 전 택시를 탔는데 검은색 대형 SUV 10여대가 섞인 행렬이 사이렌을 울리며 옆으로 지나갔다. 택시 운전사는 “저 검은 차 중 어느 한 대에 대통령이 타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택시 운전을 30년째 하고 있어서 누가 지나가는지 금방 안다고 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대통령 행렬엔 맨 끝에 앰뷸런스가 따라가는데 앰뷸런스가 없는 걸 보니 대통령이 탄 차는 아닐 것”이라고 정정했다.

워싱턴 거리에서 유명인사들을 자주 마주친다. 대개는 의원, 고위관리, 기자, 토크쇼 진행자들인데, 내가 본 최고 유명인사는 동네 마트에서 마주쳤던 국제기구 총재였다. 인터뷰하자고 하고 싶었지만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 참았다. 말을 걸었다면 그는 아마 친절하게 ‘홍보담당자를 통해 연락주세요’라고 했을 것이다. 그의 카트를 슬쩍 들여다봤다. 샴페인과 과일이 담겨 있었다.

최근에 한 모임에서 다들 자기가 만난 유명인사 얘기를 하는데, 그중 한 명이 “나는 ○○○ 대법관과 같은 아파트에 살아. 가끔은 경호원들도 나타난다고”라고 했다. 다들 “대단한 걸”이라며 실없이 웃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사무실이 시내에 있는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길 가다가 오바마를 마주칠 날을 기다린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TV 쇼 진행자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2004년부터 2017년 초까지 방영됐던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야말로 트럼프가 대중을 상대로 한 소통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였다.

트럼프가 사용하는 단어는 간결하고 선명하다. 외국인 입장에선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해석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지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인들과는 너무 쉽게 소통한다. 비결은 ‘반복’에 있다고 생각한다. 트럼프는 좋으면 ‘아름다운(beautiful)’, 너무 좋으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좋은(incredible)’이란 식으로 자기만의 사전에 따라 말을 한다. 사실은 연설도 거의 비슷한 내용의 반복이다. 북핵문제와 관련해서도 ‘북한이 더 이상 핵과 미사일 시험 안 한다, 인질과 유해가 돌아왔다, 김정은과 나는 사이가 좋다’는 얘기를 수십 번도 더 했다. 북한 얘기만 나오면 기자들이 이제 거의 다 외우다시피한 내용을 새로운 일인 것처럼 말하고 또 말한다.

성공한 코미디쇼 같은 걸 보면 코미디언이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걸 보여주는 게 아니다. 비슷한 틀이 반 이상이고 거기에 약간 다른 걸 얹어준다. 이미 알고 있고 다 본 것인데도 볼 때마다 웃게 된다. 이미 웃을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웃는지도 모른다. 트럼프가 단순한 언어로 한 얘기를 반복하면서 대중을 열광시키는 걸 볼 때마다 정치라는 쇼 비즈니스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트럼프 지지자에 한해서 그렇다는 얘기지만.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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