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가 심상치 않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일본의 진솔한 반성을 촉구하며 분통을 터뜨린다. 하지만 그것이 생각처럼 쉬운 노릇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일본은 A급 전범들이 앞장서서 재건한 나라다. 그들에게 정신적 뿌리를 둔 오늘날 주류 엘리트들은 반성은커녕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오히려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아베 수상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무조건 사죄를 강권하면 오히려 국수주의적 반발만 부추긴다. 이로 인해 양국 관계는 상식적 공감대를 파괴하며 강 대 강 대결로 치닫게 된다. 최근에 그런 양상이 유난히 두드러지고 있다. 아마 이것이 일본 우익 정치의 노림수인지도 모른다. 또한 우리 정치도 강 대 강 대결을 이용한다는 불편한 의혹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일본의 잘못을 묻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조금은 인내를 가지고 실효가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보아야 한다. 특히 정치인이든 일반인이든 일본인 중에도 여러 부류가 있다. 비록 소수이긴 해도 일본 제국주의의 잘못을 인정하는 양심적 시민들이 적지 않다. 우리가 보편주의에 입각해 그들과 교감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심지어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조선인들과 연대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소가야 스에지(磯谷季次·1907~1998)다. 그는 ‘우리 청춘의 조선’(わが靑春の朝鮮·1984)을 통해 19년간의 파란만장한 조선 체류 경험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그는 그중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기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광복(종전) 후에는 자신의 동포들을 안전하게 귀환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스물한 살 때(1928) 군대에 징집되어 함경남도 나남의 일본주둔군에 배속되었다. 아무런 희망이 없던 그는 입대 전부터 조선에 가서 과수원이나 해보자는 막연한 꿈을 가졌다. 실제로 그는 군복무 중에 5년 분할지불 조건으로 인근의 조그만 과수원을 구입하기도 했다.

그는 2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1930년에 흥남비료공장에 노동자로 취직을 했다. 여전히 과수원 구입 할부금을 꼬박꼬박 지불하고 있었다. 그는 한 푼이라도 절약할 요량으로 일본인 숙소를 나와, 허름한 조선인 하숙집으로 옮겼다. 거기서 이런저런 조선인 청년들과 만나 교류하게 되었다. 그 청년들이 바로 항일노동운동가 그룹이었다.

그중에는 바이올린을 잘 켜는 부잣집 아들도 있었다. 그 부잣집 아들은 지금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음악)보다 더 중요한 일(항일노동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소가야는 차츰 이런 조선인 청년들의 대의와 기개에 감동을 받으며, 그들의 뜻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수원)을 포기하고 그들과 함께 항일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흥남지역 노동운동조직의 일본인지부 책임자가 되어 일본인 노동자를 규합해 나갔다. 또한 비밀리에 일본어로 된 기관지를 찍어 돌리기도 했다. 하지만 곧바로 시련이 닥쳤다. 1932년 4월 그도 이 지역 조직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검거를 피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무려 1년 반 동안이나 흥남경찰서에 구금된 채 모진 고문과 취조에 시달렸다.

이듬해 11월이 되어서야 사건이 함흥의 검찰로 이첩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또다시 거의 한 해가 지나, 1934년 10월 1심에서 징역 6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것은 당시 일본인 사상범에게 내려진 가장 무거운 형량이었다. 그는 조선인 동지들과 함께 즉시 항고했다. 서울에서 항소심을 받기 위해 11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일제 사법당국은 미결수 기간을 형량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거의 재판을 받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나빴다. 혹시 자신으로 인해 항소심이 늦어지면 동지들에게 피해가 될까 우려했다. 그리하여 1936년 6월 항소를 포기하고 6년형을 확정받았다. 그는 함흥형무소로 다시 옮겨진 수감생활 내내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마침내 1941년 1월 풀려났다. 10개월의 감형을 받고도 9년 만이었다. 조선 생활의 거의 반에 해당하는 기간이었다.

출소 후 조선인 동지와 사업을 했으나 실패했다. 다시 노동자로 전전하다가, 일본 대기업 산하의 제재소에 취직을 했다. 그러다 마침내 1945년 8월 종전(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일본인인 그로서는 그것이 마냥 즐거운 일만은 아니었다. 일본인 관료, 군인, 경찰과 그 가족은 잽싸게 탈출했다. 하지만 그 나머지 일본인들은 순식간에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것이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공격에 시달렸고, 굶어 죽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런 와중에 이소가야는 함흥일본인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이제는 지역의 정치지도자가 된 과거 동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일본인의 구호과 안전귀환을 읍소했다. 일제 당국에 의해 핍박받은 전과자가 당국이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인도주의적 사업에 헌신적으로 매달렸다.

그의 노력으로 함흥지역에서는 조선 및 소련 당국의 공식적 귀환 허가가 나기 전부터 비공식적으로 수많은 일본인들이 이미 안전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조선인 동지들과 작별하고 맨 마지막으로 1946년 12월에 배에 올라, 이듬해 1월 일본땅을 밟았다. 19년 만의 일이었다. 스물한 살의 청년은 마흔이 되었다. 말 그대로 조선에 ‘청춘’을 바친 것이다.

그는 1949년 회고록 ‘식민지의 감옥’을 출간했으나, 그 이후 어렵사리 생계를 이끌어갔다. 노년이 되어서야 자신의 조선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필활동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 청춘의 조선’이다. 1991년에는 ‘좋은 날이여, 오라’를 통해 북한의 김일성 독재체제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해 서울을 방문하여 서대문구치소 등을 둘러보았다.

이처럼 이소가야는 일본인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도 보편주의적 가치에 입각해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인물이다. 그밖에도 당시에 조선인들과 연대한 일본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는 이름 없는 시민도 있었고 유명한 대학교수, 변호사 등도 있었다. 오늘날 일본에도 양심적인 시민들이 적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이 올바른 목소리를 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무턱대고 일본을 배척하면 자칫 그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여기서 불굴의 항일투사인 안중근 의사를 떠올려 본다. 그의 옥중 자서전인 ‘안응칠역사’를 보면, 그는 이토 저격 순간에도 제국주의의 원흉인 이토 이외의 무고한 사람이 희생될까 노심초사했다.(본지 제2550호 본란 참조) 그가 반대하고 제거하고자 한 것은 일본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일본 제국주의였다. 지금 우리에게야말로 그런 절제된 분별력이 절실하다.

일본은 곧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다. 일본인도 다 똑같지 않다. 그것이 다 같다고 강변하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 논리다. 우리는 그런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항일(抗日)은 철저히 견지해야 한다. 반면, 일본 자체를 무조건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배일(排日)은 삼가야 한다. 이를 냉철하게 분별하지 못하면, 양국 간에 시민적 상식은 실종되고 협량한 민족주의만 득세하게 된다. 그 폐해는 불 보듯 뻔한 노릇이다. 일본의 변화를 촉구하되, 우리도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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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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