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손병희
의암 손병희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농민군과 토벌대로 갈라져 싸워야 했던 이복형제의 파란만장한 휴먼스토리를 그린 SBS 금토드라마 ‘녹두꽃’이 종영되었다. “찰나를 살아도 사람처럼 살다가 사람처럼 죽겠다 이 말이여!” 주인공 백이강(조정석 분)의 외침은 “왜놈들 때려잡으러 가자”는 결의를 이끌어낸다. 그러나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南接)에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北接)까지 가세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에 참패를 당한다. 살아남은 이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와신상담의 세월을 보낸다.

동학은 향반의 서출로 태어난 최제우가 1860년 창시한 종교로 인내천(人乃天)을 핵심 교리로 삼았다. 사람은 본래 하늘의 성품을 가졌으므로 사람이 곧 하늘이요, 하늘이 곧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제우는 1864년 1월 18일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左道亂正之律)’로 경주에서 체포되어 그해 4월 15일 대구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제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은 교세 확장에 박차를 가해 1894년까지 40만명의 신도를 모집한다. 그러나 1894년의 참패로 동학은 새로운 시련을 겪게 된다. 최시형은 1898년에 원주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손병희가 제3대 교주가 되어 동학을 이끈다.

1894년 일본군과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였던 동학의 변신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1901년 관군의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간 손병희는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근대화론을 수용한다. 1903년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격화되자 손병희는 전쟁의 발발을 예감하고 일본을 도와 러시아 세력을 축출하여 동학의 합법화 및 국교(國敎) 지위 획득, 이에 기반한 내정개혁을 이루겠다고 결심한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손병희는 교토부(京都府)를 통해 1만엔의 군자금을 일본군에 헌납한다. 또 국내의 두령 40명을 일본으로 불러 대중정치단체인 민회(民會)를 결성하여 러일전쟁에 출병할 것을 지시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단체가 대동회(大同會)인데 7월 중립회(中立會), 9월 진보회(進步會)로 재조직된다. 손병희는 이 작업을 위해 일본에 함께 체류하고 있던 자신의 오른팔 이용구를 국내로 파견한다. 민회의 조직은 동학의 포접제(抱接制)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전국적 규모를 갖춘 10만명이 넘는 조직으로 성장한다.

한편 일본군 소장 오타니 기쿠조(大谷喜久藏)의 통역이었던 송병준은 1904년 일본에서 귀국해 8월 20일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한다. 일진회의 가입 세리머니는 단발이었다. 그러나 일진회는 수도권 친일 엘리트 중심의 조직으로 대중적 확장성을 갖지 못했다. 손병희는 8월 28일 회원들에게 상투를 자를 것을 지시한다. 이에 호응해 16만명 이상이 일시에 단발을 하니 이에 놀란 일본 신문들은 호외까지 발행한다. 진보회는 군용철도인 경의선, 경원선 철도부설 등에 2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동원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 월북한 이청원에 의하면, 손병희와 이용구는 지원자를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일진회가 정권을 잡게 되면 지사, 시장, 군수 등 관직에 임명하는 것 이외에 금전적 보상도 가능하다”라는 약속을 했다. 고종 정권은 동학 토벌 명령을 내렸으나, 일진회의 견제로 실패한다. 오히려 김연국을 비롯해 갇혀 있던 동학교도들이 11월 1일 석방되었다. 이로써 동학은 40여년에 걸친 지하생활을 청산하고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된다. 그 후 진보회는 일진회에 각 도별로 합동청원서를 제출하였고, 12월 2일 두 단체는 공식 합동한다. 이른바 합동일진회의 탄생이다. 송병준은 평의원장을, 이용구는 지방총회장을 맡는다.

동학당을 흡수 통합함으로써 대중적 세를 키운 일진회는 보호조약 지지운동, 고종 퇴위운동 등 보다 노골적인 행보를 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용구는 일진회 회장으로 승진한다. 손병희는 격노했다. “도대체 어쩌자고 보호 선언이란 망동을 하였느냐?” 손병희는 일본의 힘을 빌려 동학의 입지를 다지고 국정을 개혁하고자 했지만, 한·일병합에는 반대하였다. 그해 12월 1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다음해 이용구 등 친일파 62명을 출교(黜敎) 처분한다. 이에 반발한 이용구는 송병준과 함께 시천교(侍天敎)를 만든다.

손병희가 기미독립운동의 주역이었음은 거의 모든 국민이 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도왔고 일진회 탄생에 기여한 것을 아는 국민은 거의 없다. 일본 외교기록인 ‘조선독립운동 문제에 관한 참고자료’(도쿄·1922) 102쪽에는 “손병희는 초기에 애국적 동학당의 지도자였으나, 중기엔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손병희는 일진회와 결별한 후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거듭났다. 갈지자(之) 행보는 손병희만의 특징이 아니었다. 이완용은 친미→친러→친일로 변신하였고, 송병준은 친민씨파에서 시작하여 친청을 거쳐 친일로 변신했다. 동학은 초기 반(反)외세, 존왕(尊王), 반(反)귀족의 색채를 띠었으나 친일, 반(反)왕실을 거쳐 반일독립으로 거듭났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동안 일관된 정치노선을 걸은 인물이나 세력은 놀라울 정도로 드물다. 이는 당시 한반도를 강타한 시대의 격류가 매우 역동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자,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격류를 초지일관 헤쳐나갈 ‘뿌리 깊은 나무’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녹두꽃’ 최종회를 본방 사수한 청와대 민정수석 조국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죽창가’를 올렸다. ‘1980년 광주’를 겪고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 있었던 운동권은 동학농민운동, 아니 갑오농민전쟁을 반(反)외세·반(反)봉건을 실현할 구한말의 유일하게 올바른 대안으로 인식하였다. 조국 학생도 그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발견한 동학은 전체가 아니라 부분이었다. 자신들의 필요와 취향에 맞게 각색된 동학이었다. 갑오농민전쟁이라는 표현은 동학에 마르크스 계급투쟁의 외피를 입힌 결과였다.

온전한 역사인식은 관련된 사실 전체를 균형감 있게 소화한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그것조차 편집하고 각색하여 기억하는 것은 건강한 역사인식이 아니다. 더군다나 자신의 편협한 역사인식을 대중에 세뇌시키려는 행위는 반(反)지성적·반(反)역사적이다. 인촌 김성수는 일제강점기에 고려대학교와 동아일보를 운영하였고, 이후 대한민국 헌법 만들기와 농지개혁에 큰 기여를 했지만, 1940년대에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였다는 이유로 친일의 낙인이 찍혀 건국공로훈장을 박탈당하였다. 그렇다면 손병희는 어떠한가. 나중에는 연을 끊었지만, 매국노 집단인 일진회가 세를 키우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우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의 건국공로훈장은 무탈하다. 아마 조국은 동학의 역사를 제대로 모를 것이다. 동학의 풀스토리를 아는 ‘진보역사학자’들은 쉬쉬하고 있다. 왜? 자신들의 정치적 필요에 부합하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이건 역사학의 외피를 쓴 권모술수다.

신지호 평론가·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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