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의 조지타운 지역에 가면 ‘덤바튼옥스(Dumbarton Oaks)’ 박물관과 연구소가 있다. 오래된 저택을 개조한 이 박물관엔 소규모 연주회 장소로 쓰였던 작은 홀이 있다. 바로 유엔이 태어난 곳이다.

2차대전 막바지인 1944년 가을 그 콘서트홀에서 유엔 창설을 위한 예비회담이 열렸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워싱턴에 국제회의를 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이 큰 저택의 연주실을 회의장으로 썼다. 그래서 그 회의를 ‘덤바튼옥스 회담’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태어난 유엔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이 국제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틀이었다.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와 ‘반(反)이민’을 외치는 요즘도 나는 미국을 미국답게 하는 것은 미국이 이끄는 국제기구와 동맹 그리고 이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트럼프에게 이런 국제기구는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미국에 불필요한 부담이다. 나토(NATO)나 G20처럼 미국이 주인공인 다자회의에 가서도 트럼프는 분위기를 뛰우기보다 동맹과 우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최근 워싱턴의 한 한반도 전문가를 만나 “트럼프는 왜 이렇게 동맹국을 홀대할까”라고 했더니, 그는 “동맹국은 늘 미국에 뭔가 해달라고 부탁하고 매달리니까 그게 싫어서 그러는 거겠지”라고 했다. 웃자고 하는 얘기였지만 틀린 얘기도 아니었다.

일본의 수출규제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자 한국 정부도 한·일 간의 갈등 해결에 미국이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다. 7월 초 한국에서 고위급 관리를 파견해 미국에 한·일 문제에 대한 관심을 요구했을 때 미국 관리와 전문가들의 첫 반응은 “한·일 모두 미국의 동맹국이긴 하지만 트럼프가 한·일 관계가 어떤지에 관심이 없어서 미국이 적극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2주쯤 후인 지난 7월 19일 트럼프 대통령의 첫 반응이 나왔다. “양국의 요청이 있으면 돕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일이 해결하기를 바란다면서 양자해결 우선 원칙을 내세웠다. 이날 트럼프는 “한국 대통령이 나에게 관여할 수 있을지를 부탁해, 북한 문제는 물론이고 다른 여러 문제에도 개입하고 있는데 얼마나 많은 일에 내가 개입해야 하느냐고 했다”고 말했다. 주저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며칠 후 인도·파키스탄의 카슈미르 분쟁에 대해서도 트럼프는 비슷한 얘기를 했다. 트럼프는 지난 7월 23일 백악관에서 임란 칸 파키스탄 총리를 만나 ‘2주 전 모디 인도 총리를 만났을 때 카슈미르 분쟁의 중재자가 돼달라’는 취지의 요청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일 내가 도울 수 있다면 중재자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과 일본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바뀌었을 뿐 거의 비슷한 발언이었다. 파키스탄은 오래전부터 미국이 관여할 것을 요청해왔다.

하지만 제3국의 개입을 꺼리는 인도가 당장 들고일어났다. 인도 외교부 대변인은 “트럼프 대통령이 인도와 파키스탄이 요청한다면 중재를 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는데 모디 총리는 그런 요청을 한 일이 없다”고 밝혔다. 인도 입장에서 인도·파키스탄 간 문제는 양자 간 해결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

며칠 사이에 일어난, 비슷한 두 사례를 비교하다가 이런 의문이 들었다. 트럼프는 이제 국제분쟁의 중재자 역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한·일 관계에서 미국의 역할도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인선 조선일보 워싱턴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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