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철이다. 여행의 원초적 이미지는 홀로 길 위를 호젓하게 걷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여행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여행뿐만이 아니다. 무엇을 하든 우리는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가운데서 안도와 행복을 찾는다. 대신에 혼자 있는 것은 애써 피해야 할 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행복이 좋은 관계를 맺는 데 달려 있다는 생각이 매우 확고하다.

하지만 이런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며, 사람은 혼자 있을 줄 알아야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인상적인 담론이 있다. 바로 영국의 정신의학자 앤서니 스토(1920~2001)의 ‘고독’(Solitude·1988)이다. 부제는 ‘자아로 되돌아감(A Return to the Self)’이다. 한마디로 고독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라는 메시지다. 우리말로는 ‘고독의 위로’(2011)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조금은 아쉬운 개명(改名)이다.

유사 이래 인간은 개별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되어왔다. 그래서 남녀가 결합되어야 비로소 온전해진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그리스 철학이든 기독교든 마찬가지다. 그 결합에는 이성애적 사랑이라는 접착제가 필요하다. 특히 젊은 시절 사랑하는 사람과의 성적인 결합은 그것이 아무리 덧없다고 할지언정 다른 어떤 경험과도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점을 일찍이 심리학적 시선으로 포착한 것이 프로이트다. 그는 이성 간의 성적인 충만감을 행복한 삶의 핵심 요소로 여겼다. 반면 성적 성숙에 이르지 못해 그런 충만감이 결여된다면 심리적 장애를 야기한다고 보았다. 물론 프로이트도 문명적 제약에 의해 억압된 성적 충동이 승화되어 탁월한 창조적 업적을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성적 충만감을 이상적인 것 또는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은 성장기간이 유난히 길다. 장기간 부모의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유아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은연중에 성적인 억압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을 제대로 해소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성격이 달라진다. 따라서 정신적 혼란을 느끼는 개인을 부모와의 정서적 연결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바로 프로이트의 관심이었다.

그의 관심은 당연히 아동기와 청년기에 집중되었다. 그 시기야말로 인생에서 성적인 충동이 가장 집요한 문제가 되고, 또한 그 해결이 가장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중년 이상의 환자는 받지 않으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정신적 탄력성이 떨어지고, 어린 시절을 정확히 재구성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유였다.

후대 학자들은 프로이트 이론을 대상관계론(object relation theory)으로 확장시켰다. 그것은 유아기의 부모-유아의 관계처럼 주체가 독립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고, 어떤 대상에 의존하거나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학설이다. 이런 학문적 흐름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전통적 사고방식을 심리학적으로 정교하게 뒷받침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으레 관계를 행복의 중요한 기반으로 인식하고, 온통 거기에 정성과 에너지를 쏟았다.

그런데 이런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융(Jung)이 대표적이다. 인간은 프로이트가 관심을 집중시킨 청년기를 지나서도 오랫동안 더 생존한다. 융은 “청년의 임무는 가족에게서 벗어나 세상에서 자리를 잡고 자신의 차례가 되면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것인 반면, 중년의 임무는 한 개인으로서 자신만의 특성(즉 개인성)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처음으로 중년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바로 융이었다.

만약 우리가 외부 세계를 자신이 주체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오직 적응해야 하는 곳으로만 여긴다면, 우리의 개인성은 사라지고 삶은 무의미해진다. 따라서 융의 표현대로 ‘적극적 상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자신만의 개인성을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처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가는 것은 홀로 있어야, 즉 고독해야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수많은 천재들은 인간관계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관심사에만 매달렸다. 심지어 결혼도 하지 않고 가정도 꾸리지 않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전통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들은 불행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혼자 있는 능력(capacity to be alone)을 통해 불멸의 업적을 쌓으며, 누구보다 삶에 대한 충만감을 만끽했다.

이처럼 인간관계 이외의 것에서 삶의 중요한 가치를 찾는 것은 비단 천재들뿐만이 아니다. 범인(凡人)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혼자 일기를 쓰거나, 취미활동을 하거나, 주식에 투자하거나, 정원을 가꾸는 등 자신만의 고독한 활동을 통해 얼마든지 삶의 가치와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 다만 그들의 결과물이 대가들처럼 겉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을 뿐이다.

혼자 있는 능력은 어린아이들에게도 필요하다. 아이들이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만큼 자랐을 때 그런 시간과 기회를 갖도록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홀로 상상하기를 즐기면서 창의적인 잠재력을 기르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능력이 점점 더 크게 요구된다는 점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럼에도 기존의 정신의학은 대체로 혼자 있는 ‘능력’보다 혼자 있는 ‘두려움’이나 혼자 있고 싶다는 ‘원망(願望)’만 주목했다. 그리하여 혼자 있는 능력의 긍정적·적극적 측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능력을 통해 비로소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욕구와 느낌과 충동을 제대로 알아채게 된다. 그것이 곧 ‘자아로 되돌아감’(이 책의 부제)이다.

창조적 생각도 혼자 있는 능력으로부터 나온다. 평소에 여러 생각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다가 홀로 내면에 집중하는 어느 순간, 그때까지 아무 연관이 없던 생각과 느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로 연결된다. 바로 이때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생각이 발현한다. 이처럼 고독은 자신의 내면 세계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학습, 사고, 혁신 등을 일으킨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으레 친밀한 관계나 애착이 행복의 근원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상 인간관계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 완전한 충족감을 얻기는커녕 쓰라린 상처를 받기 일쑤다. 아무리 인간관계가 중요하더라도 고독한 가운데 혼자서만 느낄 수 있는 충족감 또한 절실하다. 그 비중은 개인의 기질이나 개성이나 재능에 달린 문제다.

저자는 작년(2018년)에 우리말로 소개된 ‘처칠의 검은 개 카프카의 쥐’로 우리에게 한층 친숙해졌다. 여기서 ‘검은 개’나 ‘쥐’는 우울증을 가리킨다. 저자는 처칠이나 카프카가 그들의 결함 있는 내면을 직시하여, 오히려 그것을 불멸의 업적을 낳는 원동력으로 삼았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들이 결함 없이 그냥 평범하게 살았다면 얼마나 행복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혼자 있는 능력’을 통해 결함을 극복하고 삶의 충만감을 만끽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고독은 두려움이 아니라 능력이다. 한마디로 고독할 줄 알아야 행복하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혼자 있는 능력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올여름 여행은 여럿이 함께해도 좋지만, 혼자 호젓하게 해도 또한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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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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