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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0호] 201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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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인사이드]지도자의 현실인식 부족과 주관적 의지가 낳은 참극

박승준  아시아 리스크 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전 조선일보 베이징·홍콩 특파원 sjpark7749@gmail.com

1958년 5월 5~23일 열린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2차 전체회의에서 마오쩌둥(毛澤東) 당시 주석은 이런 연설을 했다.
   
   “앞으로 5년 이내에 우리가 강철생산량 4000만t을 달성한다면 우리는 7년 이내에 영국을 따라잡을 수 있고, 다시 8년을 노력하면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
   
   한 해 전인 1957년 중국 전체의 강철생산량은 535만t톤이었다. 마오가 “5년 이내에 강철생산량 4000만t톤을 달성한다면…”이라고 말한 것은 “전 인민이 나서서 대약진의 정신으로 나아가 ‘판이판(飜一番·2배로 만들기)’을 이룩한다면 1958년에는 강철생산량을 1000만t으로 만들 수 있고, 1959년이면 3000만t을 생산하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마오는 5억 인민들이 역량을 다한다면 5년 이내에 19세기를 지배한 패권국가 영국을 따라잡을 수 있고, 다시 8년을 노력하면 20세기 최강대국 미국의 경제력을 따라잡을 수 있다면서 ‘차오잉 간메이(超英赶美·영국을 넘어서고 미국을 따라잡자)’라는 구호까지 내걸었다.
   
   세계 역사가 기록한 것처럼 제1차 산업혁명으로 증기기관이라는 인류 최초의 동력을 갖게 된 영국은 증기기관 동력를 갖춘 군함에 최고의 폭발력과 사정거리를 자랑하는 대포를 장착하고 남아프리카와 인도대륙, 인도차이나반도 남쪽을 돌아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앞바다에까지 도착했다. 그리고는 교역을 거부하던 청나라 군대와 포격전을 벌였다.
   
   포격전의 결과는 중국에 참담했다. 해안을 지키는 청나라 해안방어부대의 대포는 영국 군함에 가닿지 못한 반면, 영국 군함에서 쏘는 대포는 청나라 해안방어기지를 초토화시켰다. 이른바 ‘아편전쟁’으로 기록한 그 전쟁의 결과 청나라는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하고 상하이(上海), 광저우(廣州)를 비롯한 5개의 항구를 영국과 교역이 가능한 ‘개방항’으로 열어주는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허위보고 만연
   
   마오쩌둥이 선포한 ‘대약진’ 운동은 바로 그런 영국과, 영국의 뒤를 이어 세계 최강국이 된 미국을 당시의 5억 중국 인민들이 나서서 노력하면 경제력에서 앞설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친 산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대약진운동 기간 동안 중국 전역에서는 ‘웃픈’ 일들이 속출했다. 일단 마오쩌둥이 불을 붙인 대약진운동에 따라 마을마다 철을 생산한다면서 ‘토로(土爐)’라는 이름의 용광로가 곳곳에 설치됐다. 그 결과 대체로 4분의 1 정도의 중국 산림이 훼손되었는데 이는 무지의 결과이기도 했다. 강철 생산을 위해서는 고화력의 역청탄이 필요한데 나무를 베어 만든 목탄으로 아무리 가열해봤자 철광석이 녹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각 마을들은 각 가정의 쇠붙이를 모두 모아 덩어리를 만들어 상부에 납품한다면서 목탄 고로에 쇠붙이를 넣어 녹이느라 애썼다. 마을 청년들이 교대해가며 24시간 용광로를 지키는 웃지 못할 광경도 연출했다.
   
   당시 중국 전역에서 어린이들의 눈으로 관찰한 대약진운동의 비극은 1990년대 후반에 활동한 이른바 ‘지청(知靑)작가’들의 작품 곳곳에 기록돼 있다. 대표적인 지청작가 위화(余華)가 1993년에 쓴 장편 ‘산다는 것(活着)’에는 이런 기막힌 장면도 나온다. ‘마을 쇠붙이를 모두 걷어 아무리 불을 때도 녹지 않으니까 한 노인이 아이디어를 낸다. 이 노인은 “역시 끓이는 게 최고야”라며 뭉친 쇠붙이를 물에 넣고 삶기 시작했다. 쇠붙이를 삶는 현장을 마을 젊은이들이 24시간 지켰다.’
   
   대약진운동 기간 전국적으로 허위보고도 만연했다. 당시 마오가 이끄는 중국공산당은 강철생산량뿐만 아니라 농업생산량에서도 ‘2배 만들기 판이판’의 정신을 살리자고 외쳤다. 1957년 곡물생산량 3900억근을 1958년에는 80% 증산한 7000억근으로 올리고, 1959년에는 또다시 2배가 넘는 1조5000억근으로 높인다는 증산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이런 과욕은 농업생산량 허위보고로 이어졌고 결국 400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아사자가 생기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수천만 아사자 부른 대약진운동
   
   실제로는 매년 2배 가까운 증산이 이뤄지지 않는 가운데 현실과 너무나 떨어진 허위보고를 하고, 그 허위보고에 맞추기 위해 거의 모든 마을 생산 곡물을 상부에 갖다 바치다 보니 마을 곳간이 텅텅 비어버린 것이다. 급기야 사람들이 굶어죽거나 살던 곳을 떠나 도망가는 바람에 마을이 텅 비는 ‘귀신 마을’이 전국 각지에서 나타났다.
   
   일본 지식인들이 영국 산업혁명의 힘을 깨닫고 전통사회를 현대사회로 바꾸기 위한 메이지(明治)유신 혁명에 나선 것이 1868년이었다. ‘좌파 역사학자’로 분류되는 미 시카고대학의 브루스 커밍스가 1984년에 쓴 ‘동북아시아의 정치경제의 기원(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the Northeast Asian political economy)’에 따르면,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시작으로 산업화와 부국강병 정책을 실시해 벌써 1880년대에 섬유산업을 바탕으로 한 경공업 기초를 확보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중공업 기반 구축에도 성공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1930년대 일본에서 쓰던 ‘기러기 이론(Flying Geese Model)’이라는 용어를 이용해서 메이지유신으로 시작된 일본의 경제발전이 1980년대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Four Tigers)’로 불린 한국과 대만의 경제발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분석했다. 커밍스의 결론은 ‘일본의 산업발전이 한국과 대만의 산업발전을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산업발전은 산업이 발전한 다른 나라로부터 이전해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과 달리 마오는 인민들이 힘을 결집하기만 하면 단시간에 산업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정치적 목표부터 설정했고 그 결과 수천만 명의 아사자를 내는 참극을 불렀다. 현재 중국공산당 역시 마오의 대약진운동에 대해 “오만한 자만심에 빠져 경제발전의 규칙을 무시한 채, 중국 경제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과도한 주관적 의지만으로 밀어붙여 3년간 좌경적 모험주의를 시행한 결과 중국 경제가 균형을 잃고 엄중한 곤란함을 조성했다”고 공식 평가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 6일 “남북한을 합한 평화경제를 달성하면 단숨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한 것은 60여년 전 마오쩌둥이 벌인 대약진운동을 떠오르게 한다. 물론 1950년대 말의 중국과 1870년대에 산업혁명을 시작한 영국의 거리는 지금 한국과 일본의 거리보다 더 멀지 모르지만 우리 대통령이 경제 현실에 대한 인식 결핍과 과도한 주관적 의지에 빠질 경우 대약진운동 이후 중국이 겪었던 참사를 우리라고 겪지 말란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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